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호 Nov 15. 2024

이기심, 생존 본능

잡생각

체홉의 단편 「적들」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불행에 빠진 사람은 이기적이 되고...(후략)


2024년 서울시 은둔고립청년 지원사업 주관 기관인 기지개센터에서 진행하는 [내 마음 함께 쓰기]라는 이름의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번주 화요일에 첫 수업이 있었고 어제(목요일)는 2회 차 수업일이었다. 어제는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의 일환으로 음악을 듣고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표현해 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기서 일이 있었다.


어떤 분이 음악을 듣고 느낀 마음을 이야기하다 본인이 자살 기도했던 날 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사건의 조짐이 단어로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다른 분이 "안 듣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 사람이 음악을 듣고 느낀 본인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차례가 돌아갈 때까지 반복되었다. 그 후에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지 못했던 분이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여기서도 제 이야기를 못하면 저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아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자신감 없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감정은 분명히 전해지는 목소리였다. 말을 마치자 일어나서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그 일을 보면서 마음이 언짢아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지 않고 말을 잘라버린 사람이 너무하다 생각했고 그게 조금 애석했다. '좀 들어주지. 이기적이네' 

그러다가 내 짧은 생각이 또 섣부른 판단, 평가를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반대 입장에서도 생각해 봤다. 그러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이 준비가 됐는지도 모르는데 자기가 하고 싶다고 저런 이야기를 그냥 하다니. 이기적이네.'


나와 다르게 거기에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불편한 이야기, 듣기 힘든 이야기를 끊어준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나도 이기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누가 너무했던 건지 수 없을 같다. 둘 다 너무했고 둘 다 너무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기심이 상충될 때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때인 것 같다. 이 날은 말을 하고 싶은 사람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의 마음이 상충했다. 조금 더 이기적인 사람이 상처를 덜 받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또, 두 사람의 마음을 이기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는 죄스러워서 서로의 생존에 유리한 본능적인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고쳐보기도 했다.    


이후에 진행된 마음 알아보는 시간에 나는 이런 답답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직전까지 느끼고 있던 사랑, 위로, 지지 같은 긍정적 감정의 자리를 새롭게 막 찾아온 따끈따끈한 부정적 감정이 차지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에 계속 있으면 이런 일은 계속 생길 것이다. 작년부터 함께한 분들은 같이 회복이 되면서 심리 상태의 균형이 맞는 것을 느끼지만 새롭게 센터를 찾으시는 일부 분들의 극도로 불안한 감정 상태와 그들의 행동에는 내가 악영향을 받는다. 나는 그걸 이제는 숨기지 않고 인정해야겠다. 


내가 학교를 다니고, 학교에서 일을 하고, 센터 사람들과 가끔 모임을 통해 친목하는 것을 들은 청년이 

"뭐야 그럼 이제 고립청년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담고 있던 것이 실망인지 질투인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냥 내가 듣기에 '뭐야'의 억양도 불편했고 '아니에요?'도 불편했다. 10년이나 방구석에 처박혀 살았던 거 알면서 내가 1년 더 고립청년으로 머물러 있길 바라나? 내가 고립청년이 아니었으면 나랑 연락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가? 내가 고립청년이기 때문에 내가 필요했던 건가? 아닌 척 아무리 해봐도 나는 이렇게 작은 말투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는 예민하고 소심한 인간이다.


불행에 빠진 사람은 이기적이 되고, 악하게 되고, 불공평해지고, 잔인해지고,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이해할 줄 모르게 된다. 불행은 인간을 갈라서게 한다. 불공평하고 잔인하게 만든다.


나도 불행에 제대로 빠졌었고 여전히 불안하기도 한 사람이다. 아무리 생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보려 해도,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보려 해도 이따금씩 불안이 강도처럼 나를 덮친다. 타고나길 예민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불쾌한 자극을 가하는 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나도 내 생존을 위해 지금 타고 있는 구명선에서 내리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게 그때의 목소리에서 느낀 감정 이후였던 것 같다. 조금 남은 통조림을 다 같이 살아보겠다고 애틋하게 나눠먹고 있는 줄로 믿었더니, 몰래 숨겨놓고 혼자 처먹는 인간들도 있었던 것 같다고 느꼈다. 조금 실망해 버렸다. 조금 지겨워진 건지, 조금 지긋지긋해진 건지도 모른다. 환멸. 센터를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의 균형에서 명백하게 손해를 본다고 판단되면 나는 아무래도 결단을 내려야겠다. 


이기적으로, 내 생존에 유리하도록.


내가 지금 지껄이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쏟아내는 이 이야기도 부정적인 이야기, 불편한 이야기이다. 다행인 건 글로 쏟아내면 듣다가 불편한 사람이 말하고 있는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고도 원하는대로 편하게 듣지 않을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나도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듣는지 딴생각을 하면서 안구를 돌리는지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어재낄 수 있어서 좋다. 


어제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뭘 써야 될지 모르겠다는 게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라는 부분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알게 됐다. 아, 나는 글쓰기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냥 말 많은 놈이 한풀이로 글로 떠드는 거였구나. 말이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지쳤다면 그 사람에게 글쓰기를 추천해보는 건 어떨까.

작가의 이전글 크리스마스이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