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에 조직행동론 교수님께 "공기업 취업은 히키코모리 출신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들은 이후 막연하게 그걸 옵션으로 여기고 있었다. 근데 여러 선택지를 머릿속으로 재고, 입으로만 떠들면서 또 행동은 안 하고 있었다. 그러다 3월부터는 4학년이니 진짜로 물리적으로 미룰 수 없어져서 최소한의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닌 걸 알게 됐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남들 몇 년 준비하는 걸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소서나 면접은 차치하고 최소한의 공부라는 것조차 컴활, 한국사, 토익, 회계 관련자격증 등 어질어질하다.
컴활 공부를 하고 있으니 토할 것 같고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초등학생 때도 컴퓨터 시간이 어려웠고 지금도 웹에서 정보를 찾아야 할 때면 속이 울렁거리고 포기하고 싶어 지면서 약간의 패닉 같은 것이 오는 걸 느끼는데 그쪽 용어들이나 개념을 머리에 집어넣으려니 힘든 것이다. 그래서 컴활 문제집에서 "테크노스트레스"라는 단어를 봤을 때 반가웠다. 내가 그런 거 같아서.
이것저것 눌러보고 설명을 찾아 읽는다던 친구처럼 살아본 적이 한순간도 없다. 나도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요즘 많이 다짐한다. 참고 차분하게 살펴봐야지, 읽어야지. 심지어 생각해 보면 아빠한테 내가 늘 짜증스레 말하던 것도 "페이지에 나오는 정보를 하나하나 읽어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근데 난 아빠처럼 나이 먹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게 안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취업 준비 카페에서 글을 하나 남겼더니 떠먹여 달라고 하지 말고 알아보고 구체적으로 글을 쓰라는 말도 들었다.
이런 내 모습을 스스로도 느꼈던 적이 몇 번 있다. 형이 앞에서 먼저 가지 않으면 길을 찾지 못하던 어린 나, 동기 형을 따라다니던 대학 신입생 OT 때의 나, 주황색 리본을 보지 못하던 나, 전부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면이 기저에 깔려있다. 누군가 뭘 해서 보여주면 아주 잘 따라 하는데 혼자는 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림을 그릴 때도 그렇다. 지금도 나는 뭐가 됐든 기연이 나타나 떠먹여 주길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그게 너무 부끄럽다. 비대한 자아에 비해서 현실의 나는 한심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닌데, 다들 그렇게 처음 뭔가 할 때 어렵고 무서운 걸 버티고 이겨내서 잘하게 되는 건데 나는 또 도망치고 싶은 걸 보니 참 약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럽다. 컴활 공부를 하면서도 취업 준비 같은 거 하지 않고 졸업하고 몸 쓰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집중을 방해했다. 알바를 몇 번 해보지도 않았지만 주로 몸 쓰는 일을 했었고 군대에서도 남들은 몸 쓰는 일을 싫어할 때 나는 반대였던 기억들이 '너는 몸 쓰는 일이 적성에 맞아. 왜 고생을 사서 해?'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알아본 일 중에는 좀 더 더럽고 힘든 일이지만 지금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강서, 경기, 대구 쪽에 가서 바로 시작할 수 있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러다 보니 왜 내가 힘들게 스펙 쌓기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반발심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셋째 누나가 참는 거는 힘들지만 참는 기간이 그걸 해결해서 이득 보고 사는 기간보다 훨씬 짧다고 참으라고 한다. 무서워서 자신 있는 거, 쉽게 할 수 있는 거 하면 안 좋은 꼴이 난다고. 말 자체도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고, 브런치에 글 써보라고 했던 누나기 때문에 말을 듣고 마음을 다 잡았다.
이번에 수업을 같이 들었던 학생이 오늘 카톡으로 공기업 취업 관련 학교 프로그램 링크를 보내주며 "형님은 우직함이 멋지다"며 "페이스대로 가시면 잘 될 거"라고 말을 했다. 또 네이버 카페에서는 어떤 분이 지나가다가 내 글을 보고 굳이 채팅을 걸어서 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줬다. 자신감의 차이라고. 컴활 1급, 한국사 1급, 토익 850 맞추고 NCS 열심히 공부하면 된단다.
남들 말을 들어서 그럴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내게 좀 더 자신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결국, 포기하지 않기로 힘을 내보면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입으로 말해본다.
공기업을 목표로 하게 된 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도 누구나처럼 탈모가 올 정도로 두렵고 스트레스받는 취준 기간도 결국 이겨내 보고, 정장 입고 면접 보러 다니고 그러다 떨어져서 자존감도 털려보고 최종합격해서 출근도 하고 퇴근도 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꿈이랑은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존감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24년 3월 25일에 배송되어 내 기숙사 방에서 살게 된 오렌지레몬나무가 얼마나 처절한 생존 싸움을 해왔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내 입장에서 보기에는 오렌지레몬은 물만 먹으면서 꽃을 피웠다가 열매도 맺고 그 열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지고, 익고 있다. 화분을 보면 '저절로' 편하게 그리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겠지, 물만 먹어가지곤 아무것도 안되겠지, 그러니까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버텨서 성장해야 된다.
개인사와 공부 불안에 묻혀 하루종일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고 있지만 운동을 하고 걷기를 하면서 이겨내보려고 한다. 그래, 작년엔 인생 재활한다는 명분으로 체험하러, 놀러 다녔으니 올해는 이렇게 살자. 책임져야지 니가 그렇게 살았으니까. 포기만 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고통을 겪을 때 생각할 것: 수치가 아니다. 내 지성을 타락시키지 않는다. 고통에는 한계가 있으며 상상으로 과대평가만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발전이라고, 좋게보인다는 말을 형수에게 들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할 수 있다. 잘 하고 있다. 멀리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