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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플랜브릿지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by 온호

둘째 누나의 생일이었던 26일 수요일, 혜화의 은둔고립청년 지원사업 기관인 청년기지개센터에 다녀왔다. 25년도 사업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2025년이 되고 대학 4학년이 되면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기지개센터를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사업에 참여할지 말지 고민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것 같다.


작년에는 공강일 없는 학교생활을 했다 보니 프로그램 참여가 제한적이었고 그래서 거의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번 학기는 사업 참여를 목적으로 공강일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 근로를 좀 더 편하게 하려던 의도였는데 근로 신청을 안 해버린 바람인지 덕인지 마침 공강일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도 많이 변하면서 센터의 분위기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 같아 더 이상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 오랜만에 기지개 청년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내가 가장 불안한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들 사이내가 알지 못하는 대화와 시간, 추억에 유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난 뭘 한 걸까. 고립은둔청년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고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은 감각이 지겨웠다. 다행인 건 그런 마음은 근본적으로 욕심이 만들어낸다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는데도 무기력의 늪에 빠져있는 기간이 영겁같이 느껴진다. 아침마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독서를 하고 건강한 루틴을 되찾으려고 그나마 조금씩 애를 쓰고 있다.


이런 와중에 혹시라도 나에게 도움이 될 프로그램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오티에 참석했는데 정말 딱 맞는 것이 있었다. "청년플랜브릿지"였다. 쉽게 말해서 말만 하고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관리, 감독해 주며 돕겠다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이해하기로.) 요즘 내가 입만 살아선 행동하지 않는 게으른 인간이라는 걸 나 자신이 역겨워질 만큼 너무 절감하고 있었는데 청플지를 계기로 다잡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작년 권역 복지관에서도 면담 때 목표 수립을 하고 시작했는데 진행이 되진 않았고, 리더십개발 강의 때도 미션, 비전, 마일스톤 등 비슷한 목표수립 과정을 거쳤었다. 지금은 다 흐지부지 돼있다. 이런 걸 볼 때 내가 싫어진다. 악착같이 하려는 욕심만 있고 의지가 없는 것이 싫은 것이다. 한심하다.


혼자 살면서도 혼자 의지로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남 눈치 볼 일이 없어졌을 때 튀어나와 마주친 것이 내 본성이었고 그게 그리 멀끔하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오늘은 와이파이 공유기를 설치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한 시간 넘게 씨름을 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뭔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마지막 단계까지 가지도 못하고 연결이 안 됐다. 똑같이 하는데도 어쩔 땐 되고 어쩔 땐 안되니까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자괴감에 빠져서 포기하고 랜선 젠더를 주문했다. 그리고 컴활 공부를 깔짝거렸다. 그나마 컴활 실기를 하면서 지시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걸 연습하고 있으니까 공유기 설치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치가 안 되는 건 벽단자 문제일 수도 있다. 집주인분이 말하길 두 개 중에 하나만 되는 거라고 했었으니까.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이것 때문에 정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부끄럽지만 이런 영역이 내 역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도 못하는 내가 너무 싫고 분노조절도 못 하는 내가 또 싫었지만 화를 삭이고 할 수 있는 걸 했다. 다이소에 가서 랜선 젠더를 찾아봤다. 딱 그것 빼고 다 있었다. 그래서 바로 쿠팡앱을 켜서 주문했다. 해결을 하면 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안" 해서 지옥을 만드는 건데 난 언제쯤 철이 들까. "안"하는 것에 너무 절여졌다. 새 사람이 되어보자 제발.


아침에 거울 보면서 나에게 사랑한다고 하는데도 왜 이렇게 내가 싫을까.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해. 할 수 있어. 하면 돼. 하다 보면 늘어. 괜찮아.


그래도 오늘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일기도 썼다. 은행 볼 일도 안 미루고 마무리했고 처음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도 바꿨다. 처음 할 때는 헤맸던 출근부 제출도 했다. 너무 사소하다고? 그래, 남들 숨 쉬듯이 당연하게 하는 사소한 일들이 전부 처음인 인생을 사는 게 나다. 언제부터 내가 남들 똑같이 살려고 욕심냈나 모르겠다. 직접 속옷을 사 본 적도 아직 없다. 이상하긴 하다. 속옷 거래보다 부동산 거래를 먼저 했다. 내 돈은 극히 일부였지만. 아직도 멀었다.


다이소에 다녀와서 액세스 문제를 풀고 있다가 타이밍 좋게 친구한테 선물을 받았다. 공유기 문제를 일단락 짓고 기분이 나아진 상태여서 말도 이쁘게 나가서 다행이었다. 선물은 광견에게 쏘는 마취총 같은 효과가 있었는지 남아있던 분노가 사그라들고 인생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 있었다.


혼자 해라 하길래 혼자 해보려 하는데 이게 혼자는 힘들구나. 많이 힘들구나. 그러고 보니 공유기 설치하다가도 "누가 좀 제발 도와줘."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었다. 그래도 혼자 하는 훈련 이제는 미루지 않아야지.


공유기 집어던져버리고 싶은 거 잘 참았다고 나한테 칭찬이나 해줘야겠다. 기준이 참 소소해서 좋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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