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오늘은 금요일, 대학생들이 공강일로 만들기 좋아하는 요일이다. 아침밥을 먹으러 가도 금요일은 늘 학생 식당이 평소보다 훨씬 한산하고 캠퍼스도 마찬가지다. 그런 금요일에 나는 1교시부터 6교시까지 강의가 빈틈없이 차있다. 노렸던 교양 과목들을 수강 신청 할 때 모두 잡지 못하고, 그래서 생긴 시간표의 빈자리에 시간이 맞는 강의들을 퍼즐 맞추기 하듯이 모아 넣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다. 수강 정정 기간이라 강의에 대한 오리엔테이션만 하는 주간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 지금보다 훨씬 지쳤을지 모른다. 다음 주 실전 금요일이 기대된다. 그때는 진짜 헤르미온느식 대학 생활을 살짝 체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강의인 [클래식음악산책] 강의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곧장 가지 않고 역 앞 마트에 들러 음료랑 간식거리를 간단하게 샀다. 내일 오후에 서울시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을 통해 알게 되어 1년 넘게 교류하고 있는 친구 청년들 몇 분이 집들이 삼아 집에 방문을 하기로 했는데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에는 혼자 살게 되어서 누군가 집에 오게 되면 요리도 직접 해서 대접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알코올도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다. 막상 진짜 자취를 하게 됐지만 본가에 살 때 하던 요리를 하려면 식기, 조리도구, 양념장, 향신료 등 처음부터 새로 사야 할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늘려간 주방 살림들은 엄청난 인프라였다. 애초에 아직 요리를 하지 않는데 "자취"라고 불러도 되나 싶기도 하다.
여기 원룸에는 주방 쪽에 콘센트도 없고, 오늘 알게 된 것인데 인덕션은 큰 불이 고장 나있다. 저녁 시간에 알게 돼서 건물 관리인께 바로 고쳐달라고 말하기는 죄송스러워 다음으로 미뤘다. 인덕션도 처음 써보니 가스레인지에 비해 너무 불편하다. 구조적으로도, 졸업반이라는 시기적으로도 요리를 하기에는 마뜩잖다.
현관 위 다락같은 창고의 곰팡이는 결국 처리해 줄 기미가 안 보여서 그냥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들어가기도 불편하고 내부도 좁아 일꾼 섭외가 안된다는 말만 반복하던 건물 관리인 분과, 관리해 주시는 분께 말씀드려 보라는 집주인 분 사이에서 핑퐁 당하는 게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아 오늘 다시 한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 "안되면 그냥 제가 직접 할게요"라는 식의 말을 공손하게만 바꿔 말했더니 바로 곰팡이 제거제를 주문해서 문 앞으로 보내겠다는 칼답이 돌아왔다. 세상 야박함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는 집 정리랑 청소를 시작했다. 대체로 미뤄둔 작업들을 하게 됐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꽤 여럿 온다고 하니 꾀를 내어 현관 공간도 확보하게 되고, 쓰레기봉투랑 분리수거 조금 해둔 것들을 이 참에 버렸다. 주방 서랍장에 맞춰 시트지도 붙이고 이사 들어올 때 유일하게 안 닦았던 부분인 에어컨도 닦았다. 멀티탭도 하나 추가하고, 내내 거슬렸던 바깥쪽 창문도 밀대 걸레를 사 와서 닦았다. 아쉬운 건 알고 보니 지저분한 자국들이 유리창의 바깥쪽 면이 아니라 갇힌 안쪽의 면에 있어서 닦아 지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많이 아쉬웠다. 그리고 커튼 하나로는 폭이 부족해 하나 더 주문한 같은 커튼을 반대편 창문에 달고 주름이 펴지도록 섬유탈취제를 뿌렸다. 대충 어느 정도 손님맞이 준비가 끝이 났다.
모닝 루틴에 새로운 변화도 곁들여볼 겸, 냄새 맡으며 힐링도 할 겸, 아빠처럼 핸드밀로 커피콩을 갈아서 핸드드립을 좀 해볼까 고민하면서 어떤 걸 살까 하고 있는데 둘째 누나가 핸드드립 세트를 주문해 보내줬다. 오늘 저녁 늦게 마지막으로 구성품 하나가 도착하면서 내일의 손님들께는 커피를 내려드린다는 가능성도 생겼다. 아무래도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제법 설레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