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
이틀 전인 지난 토요일에는 내 자취방 집들이가 있었다. 내 이사 사실을 아시는 몇 청년분들이 농담 식으로 방 뺏으러 간다며 몇 명을 더 모아 함께 방문을 해주셨다. 사실 '집들이'라고 까지 거창하게 생각은 안 하고 그냥 방을 잠깐 구경하고 대화 나누다가 나가서 저녁 먹고 카페도 가면 가는 보통의 모임 정도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 됐건 누추한 방에 손님들께서 몸소 찾아와 주신다니 설레는 맘으로 웃으면서 회기역에 마중하러 갔다. 근데 오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진지하게 선물도 챙겨 오셔서 굉장히 기분도 좋고 고마웠다. 즐겁게 감동스러웠다.
방에 도착해서는 앉을자리도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각자 자리를 찾아 잡고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동을 꽤 해서 오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런 만큼 방이 우리들 잠시나마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던 게 흡족했다. 왜냐면 나는 청년들과 가끔 모임을 하는 날이면 누구 집에라도 그냥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가듯 들어가서 맥주 까마시고 대화 나누며 쉬고 싶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청년들에게 그런 공간을 제공할 수 있게 돼서 그랬던 것 같다. 아마 잘 못 그러시겠지 만들 내 방을 그렇게 올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해 주면 감사할 것 같다.
군것질 거리를 좀 내드리고 누나가 생일 선물 일찍 보낸다며 보내 준 핸드 드립 세트로 커피를 몇 잔 내려서 나눠드렸다. 세트로 오다 보니 스타벅스 갈린(그라운드) 커피가 왔는데 그래서 커피 맛의 선택권이 없었던 게 아쉬웠다. 커피가 맛이 없었다. 직접 내려서 향이 풍부한 커피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밍밍한 스타벅스 커피 맛이었다. 손님들 드려놓고 "맛없는 거예요."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한 분에게만 귓속말로 꿍얼거리고 말았다. 핸드밀로 갈아서(그라인드) 마시는 아침 루틴을 만들어 볼 계획이기 때문에 스타벅스 커피를 다 마시면 에티오피아 원두 중에서 하나 골라볼 요량이다. 부모님 집에서는 아빠가 주로 예가체프 커피콩을 사두시는데, 익숙한 그 맛을 따라갈지 아니면 나는 시다모, 짐마 같은 걸로 새롭게 한번 가볼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그냥 싼 걸 살지도 모르겠다. 카페&베이커리 박람회 때 맛있게 먹었던 커피도 에티오피아 원두였었는데 이름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한 시간쯤 방에 머물다가 나와서 집 바로 앞의 큰집닭강정에서 닭강정을 간식으로 사서 일종의 소풍을 갔다. 중랑천까지 걸어가서 피크닉 테이블 비슷한 것 위에다가 놓고 음료와 닭강정을 먹었다. 다 먹고는 그대로 이어 걸어서 북서울꿈의 숲까지 갔다. 장장 두 시간 여를 함께 걸었다. 밖에서 함께 먹는 것, 함께 걷는 것, 걸으면서 대화하는 것, 이런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될만한 것들을 굉장히 별 거로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렇게 오래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원에 도착해서는 사슴 구경도 하고, 월영지 앞 정자에서 과자 까먹으면서 쉬었다가 일어나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사람들이 모일 때는 늘 메뉴 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늘 그렇듯 이 날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청년들 모임 때는 운 좋게 괜찮은 식당으로 가게 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들 오래 걸어서 힘들기도 했고 저녁도 든든하게 먹어서 피곤이 눈에 내려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노래방을 가서 일정을 섭섭지 않게 마무리하고 돌곶이 역에서 헤어졌다. 헤어짐은 아쉽다.
3월 10일 월요일
9시 강의인 [고전 읽기:플라톤]은 앞으로 겪게 될 난관이 예상되는 수업이었다. 어려웠다. 수업 중에 지적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지도를 읽는 것(정신의 눈으로 보는)으로 간단하게 알 수 있다며 예로 드셨는데 그 말을 듣고 많이 찔렸다. 나는 확실히 시점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사물을 보는 것을 잘 못한다. 지도나 공간도 잘 못 읽을뿐더러 블럭 쌓아진 그림이나 도형 이어 붙여 놓고 묻는 문제를 많이 어려워했다. 아무리 보려고 해도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지적 능력 이외에도 다른 지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던 게, 교수님은 소통 쪽의 지능은 부족해 보이셨다. 그러니까 혼자 말하는 수업을 하시는 스타일이라는 거다. 그래서 앞으로 힘들 것 같다는 거고. 그래도 교수자에 대한 호감도가 학습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 크다고 하니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5년 전 1학년 2학기 때는 다른 이슈도 있었지만 학습 의욕 저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F를 맞아버렸기도 하니까.
오늘의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와서는 새롭게 만나게 된 주민센터로 향했다. 전입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주민센터 앞에서 유치원에서 처음 일할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를 만났다.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캠퍼스에서 유치원생들을 만나도 아는 척을 하지 않다가 이번에는 못 참고 해 버렸다. 첫 반이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던 아이였어서였다. 머리가 좋은 여자애. 부모님이 서울대를 나왔다고 했었던. 처음 보는 아저씨가 아는 척을 해 당황해하는 표정을 보자 호탕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내 갈 길 갔다.
아이들은 금방 잊고,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아는 척을 하는 어른의 존재가 당사자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내 어릴 때의 경험으로 안다. 뭔가 미안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보며 웃는 즐거움, 반가움이 나를 뺀 어른들끼리의 것 같기도 하고. 어릴 때 아빠 동료 목사님들로부터 그런 경험들을 종종 했다. 어린이로서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서 원래는 안 그러는데 오늘은 못 참았네.
전입 신고하고 스티커를 받아서 주민등록증 뒷면에다 붙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뀐 등본을 LH 쪽에다가 팩스를 보냈다. 팩스 보내는 것도 두 번째라 순조롭게 했다.
방에 들어와서는 설거지를 하고 탕수육, 단호박 튀김을 반찬으로 튀기고 김치찌개 데우고, 볶음밥 녹여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선물 받은 위스키가 어떤 맛인가 궁금해서 조금만 마셔 봤다. 여러 냄새가 났지만 꿀냄새랑 바닐라향이 났던 것이 기분 좋았다. 소주가 왜 아무 향도 없는 술이라고 욕먹는지도 알겠고.
여기까지로 내 자신에게 미리 기름칠을 해주는 것을 마친 후 창고 공간에 곰팡이제거 스프레이를 뿌리는 작업을 했다. 천만다행으로 스프레이만 뿌렸는데 달라진 게 보였다. 한 통을 다 뿌리고 쉬고 있으니 숨고에서 견적을 내주신 업체 중 한 곳 사장님이 친절하게 전화까지 직접 하셔서는 내게 상황을 물어보시더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알려주시기까지 했다. 그분 말대로 벽지를 물에 불려서 뜯어내고 약치고 방수페인트까지 할 수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일단은 지금 상태로도 나아진 부분이 보여서 기분이 좋다. 벽지 곰팡이 제거도 생각보다 주방 청소처럼 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곰팡이제거 스프레이를 뿌려놓고 환기가 되도록 해놓은 후 집들이 선물로 받은 인형 교환을 하러 갔다 왔다. 새 인형인데 등 쪽에 오염이 있었다. 오히려 잘 된 건지 그 덕에 조금 더 내 취향인 인형으로 바꿀 수 있었다. 들인 김에 세탁 세제로 목욕도 시켜서 말리고 있다. 나머지 하루는 일기를 쓰고, 반납하기 전 독서 기록도 남기고, 공부도 하고 하는데 쓰게 될 것이다.
이렇게 소소하게 오늘 하루를 살았다. 큰 일도 없는, 대단한 일도 없는, 그저 멈춰 있지 않을 뿐인 어떤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