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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학교 공부

by 온호

재수하지 않고 2010년에 대학 입학했고, 2011년에 첫 휴학을 했다. 2014년에 복학을 했고 2014년 2학기에 두 번째 휴학을 했다. 그리고 2023년 2학기에 재입학을 했다.


이번 학기에는 [금융리스크 관리] 강의를 듣고 있다. 게리 올드먼을 닮은 아주 신사적인 교수님의 [투자론] 강의를 작년 1학기에 수강했었는데, 교수님의 인격과 실력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성적도 잘 나왔어서 이번 학기에도 같은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 신청한 것이다. 근데 강의가 너무 어렵다. 4학년 과목으로 빼놓은 만큼 내용 자체가 아무래도 어려운 것도 있을 테고, 내가 원래 계량적인 것에 약하기도 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교수님은 종종 "여러분이 경영 통계학에서 배우셨겠지만"이라는 말을 하신다. 물론 배웠다. 2010년 2학기에. 무려 15년 전이다. 성적 기록을 보니 B-를 받았던 모양이다.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면 '학교를 안 쉬고 쭉 다녔으면 기억이 났을까?'같은 생각이 든다. 이건 아마 후회가 시키는 생각일 것이다. 왜냐면 지난 학기에 공부한 내용도 생각이 안 나는 판국에, 아무리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쭉 다닌 학생이라 해도 최소한 3년 전 공부한 것은 잘 기억이 안 날 것이기 때문이다. 남학생의 경우는 군 휴학까지 끼면 + α 까지 있으니 더 안 날 것이고. 있지 않은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생활 곳곳에 조금씩은 묻혀 있다는 걸 이런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땐 속으로 한 번 웃어 본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글을 써 봐야지.'하고 생각한다. 그게 사는 법이다.


학교 공부를 하면서 '운이 좋다.'라는 생각도 든다. 금요일 1-2교시에 [국제사회와 법] 강의를 듣고 3-4교시 강의인 [평화와 갈등] 수업을 들을 때 그렇다. 두 강의는 관점은 다르지만 같은 사건을 다룬다거나, 배우는 개념이 종종 겹치거나 한다. 평화와 갈등은 계획했던 시간표 대로 신청을 못해서 되는대로 주워듣게 된 강의인데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신기하다. 특히 패들렛으로 수업 주제에 대한 생각을 적어낼 때 [국제사회와 법] 시간에 배운 개념들을 아주 유용하게 써먹는데, 그럴 때마다 속으로 개꿀을 외친다. 쾌재를 부른다.



월요일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역사를 보다」 촬영이 있었다.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냉큼 방청 신청을 했었고 당첨이 됐다. 촬영이 시작하기 전 교수님들끼리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경쟁률이 5:1 정도가 됐었다고 하는데 역시 운이 좋았다.


첫 이야기는 성경에 대한 이야기(출애굽)로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주제를 가지고 미국사학, 이집트학, 고고학, 지리학, 이슬람학 교수님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셨다. 4시간이나 앉아있었지만 상당히 재밌고 즐거웠다. 이야기 자체가 재밌어서 그랬기도 했지만 아마 이번 학기 교양 강의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국제법을 알면 뉴스가 보인다』더니 국가의 성립, 승인, 관할권 같은 개념들이 나오는 대목에서 그랬고, [고전 읽기] 시간에 배운 솔론,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상 정책, 제해권과 제국의 출현 같은 개념들이 나오는 대목에서도 그랬다. 또 [국제사회와 법] 시간에 다룬 여러 국제 분쟁이나, [평화와 갈등] 시간에 다룬 국제 분쟁과 제노사이드에 대한 것도 교수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배운 것을 통해서 그래도 이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즐거웠다.


오늘 아침 [고전 읽기-플라톤] 시간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관련해서 배우다가 제노사이드의 10단계와 관련된 내용이 나왔다. 비인간화였다. 탐욕 때문에 발생하는 분쟁과 미움 때문에 발생하는 분쟁이 다르고 상대방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움/증오로 발생하는 분쟁은 상대방을 비인간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부른 것이 생각났다.


그냥 나가기로 했으니까, 졸업하기로 했으니까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뭐, 다니다 보니까 얻는 게 있는 것도 같아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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