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우산

by 온호

지루할 만큼 별 일 없이 지나간 하루는 사실 굉장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오늘 뉴스에는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 있었고, 내일 5.18에 대한 소식이 있었다. 그 뉴스들을 보다가 내 오늘이 얼마나 평온하고 안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딘가의 공장에서 난 화재를 진압하러 소방관들이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난 『진격의 거인』완결을 봤고, 분리수거와 방 청소를 한 후 당근 김치(마르코프차)를 만들었다.

오늘 오후에 엄마가 서울에 왔다. 친척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사러.라고 큰 누나는 알고 있다. 실은 큰누나랑 같이 살던 막내 여동생이 이번에 결혼하면서 누나가 혼자 살게 되니 신경 쓰여 올라와 본 것인데 말은 그렇게 했다고 한다. 엄마가 누나에게 자신의 '필요'를, '역할'을 만들어 주려는 거였구나 하고 생각하면 너무 주제넘을까. 이미 그런 생각이 들어버렸으니 그건 어쩔 수 없고 어쨌든 누나랑 엄마가 옷을 사는 동안 따라다니느라 정말 힘들었다. 쇼핑 체력은 정신력의 일종인 것 같다. 분명 체력은 일흔이 넘은 엄마보다 내가 떨어질 리가 없다.


저녁을 먹고 셋이서 내 자취방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피해 일부러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가 중간에 퍼졌고 그래서 기사님은 백업 차량을 수소문했다. 꽤 지체되었지만 다행히 도로 중앙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탈 수 있었다. 처음 겪어 보는 일이어서 재밌긴 했는데 그게 하필 엄마가 온 날만 아니었으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고가 아니라 버스가 그냥 혼자 퍼진 거여서 다행이었다.


방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가 내일 아침 먹을거리와 엄마 교통 카드를 사러 다 같이 또 나갔다. 살 걸 다 사고 마지막으로 다이소에서 소금통을 하나 사서 나오는데 누나가 다이소 입구 인도에 떨어져 있는 하늘색 프라다 반지갑을 발견했다. 누나는 안에 연락처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없었고 고려대에 다니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의 지갑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근처 파출소를 검색해 봤지만 생각보다 멀었고 카드사로도 전화를 걸어 봤지만 도움이 안돼 누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면서 고민했다. 보통은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지갑이 값이 꽤 나갈 테고 비까지 오고 있어서 누나는 그럴 수 없다 했다. 다행인 건 세 명이서 그렇게 '이젠 어떡해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말없이 서있기 시작하자마자 한 여학생이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다 누나 손에 들린 지갑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화색이 된 편한 옷차림의 여학생은 마찬가지로 화색이 된 누나에게서 지갑을 건네받고 외국인 말투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이때 장바구니에 든 내 칵테일 얼음이 녹기 전에 주인이 나타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누나가 "큰집닭강정을 이름만 들어 보고 한 번도 안 먹어봤다."고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큰집닭강정에 가 볼 의사를 비췄다. 나는 이사 오고 나서 꽤 여러 차례 방문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미리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려 했다. 하려 했다. 주문이 밀려서 사장님이 주문을 안 받으셨다. 그래서 역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 닭강정을 사러 가게 됐다. 조리가 끝나고 계산을 할 때가 되었을 때, 한 여자가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혹시 조금 전에 제가 여기 검은 우산 두고 간 거 있어요?"하고 사장님께 물었다. 사장님은 "남자가 가져갔다."고 했다.


문제는 사장님이 우산이 그 남자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산을 안 쓰고 온 남자가 사장님께 이걸 쓰고 가도 되겠냐고 물어봤다고 하고, 사장님은 자기가 그러라고 했다고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가족으로 보이는 나이 든 여성은 뒤에서 반대 편을 쳐다보며 "그걸 그냥 줘버렸어?" 하고 모두에게 들리는 혼잣말을 했다. 사장님이 여자에게 5천 원 정도 보내드리면 괜찮겠냐고 하니 여자는 그 우산이 실은 양우산이고 6만 원 짜리라고 말하며 구매 내역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때 포장마차 사장님이 남자 손님에게 생각 없이 베푼 무책임한 친절이 한 여자의 하루에 분노와 억울함을 만들고, 사장님 스스로에게도 고통을 불러왔으며, 이득을 본 건 오직 자기 것도 아닌 좋은 우산을 가지고 떠난 남자밖에 없는 순간을 더 보고 있기 힘들어 체크카드를 돌려받고 서둘러 포장마차를 떠나왔다.


누구는 신용 카드, 체크카드, 학생증, 외국인 등록증, 현금 등이 들어있는 프라다 지갑을 무사히 찾아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누구는 구매내역을 금방이라도 찾을 수 있는 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6만 원짜리 우산을 잃어버려 화가 났다. 물론 우리나라가 우산이나 자전거를 돌려 쓰는 것쯤으로 생각해서 훔쳐가는 일이 귀중품을 훔치는 일보다 비일비재하다지만 참 흥미로운 일이었다.


나는 오늘 내 재산이 불에 타지도, 그 불을 꺼야 되지도 않았고 지갑이나 우산을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도로 한복판에서 버스가 퍼지는 바람에 10분 정도 귀가가 지체됐을 뿐이고, 퍼진 버스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옮겨 타다가 습관적으로 교통카드를 찍는 바람에 1,500원 손해를 봤을 뿐이다. 민족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거인이 되어 목숨을 희생하지도, 군부 세력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목숨을 걸지도 않았다. 가족과 외식을 하고, 쇼핑을 하고, 오늘 만든 당근 김치 맛을 자랑하고,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하며 보낸 정말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든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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