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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엄마 손

by 온호

기차 타고 서울까지 올라와서 또 하루 종일 바깥으로 돌아다닌 덕에, 엄마는 내 작은 자취방에서도 모처럼 푹 잘 주무셨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떠서 엄마가 기차 타고 내려가기 전까지 오전에 어딜 가면 좋을까 고민했다. 청년들이 내가 사는 동네로 왔을 땐 늘 내가 다니는 캠퍼스 산책 코스를 소개해줬었다. '나는 이렇게 산다.'는 걸 엄마에게라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척추협착증 때문에 예전처럼 오래 잘 걷지 못하게 된 것이 걱정돼서 선뜻 오르막이 많은 학교 캠퍼스를 '구경해보겠느냐"라고 말을 못 했다. 그러다 큰 누나와 점심 약속 장소를 상의하면서 동선을 최소화할 필요가 생겼다. 불가피하게 엄마한테 "학교 가서 산책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안 그래도 네가 늘 다니는 산책길과 사진 찍는 곳들을 직접 가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매일 가는 곳에 또 가면 내가 재미없을까 싶어 엄마는 가보고 싶었는데도 가자고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어릴 때 감명 깊게 읽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리는 한편, 오전 일정에 대한 고민도 일단락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집에서 아침으로 삶은 달걀 한 두 개와 과일을 드신다. 그리고 우리밀빵 같은 것들을 같이 드실 때도 있다. 그래서 달걀을 두 개 삶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하듯 마땅히 엄마에게도 소소하지만 대접하고 싶어 파스타를 했다. 안 먹는다, 안 먹는다 하지만 계란 외에도 파스타 조금, 바나나도 조금, 빵도 조금씩 다 드셨다. 마지막으로 물을 많이 마시라 해도 늘 물 대신 차를 먹는 엄마에게 카모마일 차도 한 잔 드렸다.


엄마가 머리를 만질 동안 나는 세수만 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가지고 온 조금의 짐과 전 날 산 옷 몇 개가 들어있는 무겁지도 않은 엄마 가방을 엄마 손에서 반대편에 있는 내 어깨에 메고 남은 손으로는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 손 엄청 크네?" 엄마 손이 이리 큰 지도 난 평생 모르고 살았던 모양이다. 뭔가 일순 엄마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하고 산 불효자 같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렸지만 엄마는 "형도 얼마 전에 같이 핑크뮬리 보러 갔던 날 똑같이 말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좀 괜찮아졌는데,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것보다 큰 위로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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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걸어가지만 엄마와 마을버스를 타고 가서 학교 정문에서 내렸다.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덥지도 쌀쌀하지도 않고 밝고 맑아 딱 좋은 오전 10시였다. 손을 꼭 잡은 채로 내가 일했던 도서관에서부터, 본관, 평화의 전당, 화성교, 숲길, 미대 코스를 거닐었다. 그 내내 엄마는 내게 꽃이나 나무를 보며 이름을 읊는 것이 삶의 당연한 부분이 되도록 만든 사람답게 씀바귀, 찔레꽃, 때죽나무, 베고니아 등 보이는 식물들의 이름을 밝혔다. 때죽나무 향기가 좋다고 함께 말할 때는 엄마 같은 사람이나 나와 비슷한 사람과 연인이 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거닐었다고 하기에는 조금 험난한 오르막길 코스를 포함해서 한 시간 가까운 산책을 마치고 경동 시장으로 이동했다. 스타벅스 경동 1960점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점심을 먹고 서울역에 가는 동선이었다. 누나랑 스타벅스에서 보기로 하고 시장에서 스타벅스로 들어가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엄마 신발 굽이 떨어졌다. 커피 주문을 해 놓고 엄마랑 누나가 마실 동안 나는 시장에 있는 구두 수선 집에 가서 신발 굽을 붙였다. 누나가 백화점에서 사 준 신발이라는데 오래 신은 모양이다. 수선해 주시는 분이 신발이 삭아서 붙여놔도 나중에 다시 떨어질 거라고 집에 가셔서는 버리라고 하실 정도였다.


카페로 돌아와서 그 말을 그대로 전했지만 엄마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돈은 안 주셔도 된다고 말하는 사장님이 붙여주신 신발을 한 손에 들고 시장을 지날 때도 별생각 없었지만 삭은 신발을 안 버리려는 엄마 태도를 보니 신발을 하나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누나가 경동 1960점에서만 파는 스타벅스 디저트를 구경하러 간 사이 나는 유자민트티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너는 누나가 말할 때 안 무섭니?" 하고 물어봤다. 나는 뭐, 별로 신경 안 쓴다고 그랬다. 그리고 엄마한테 "어제 버스에서 그랬던 거?" 그러면서 내가 모르지 않는다는 걸 알려 줬다. 큰 누나는 지하철을 다니다 보면 보이는 어떤 유형의 사람이다. 지하철 문이 열려서 사람들이 얼른 나오고 들어가려고 계단과 노란 선 앞 길에 몰리는 와중에 급하게 지나가는 사람이 어깨나 가방으로 자신을 치고 가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서 뒤돌아보며 신경질을 내거나 욕을 하는 유형의 사람.


작년쯤에도 한 번, 명절에 본가에 나랑 같이 있을 때 누나는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을 세게 하는 화법으로 내게 뭐라고 했었다. 나는 불쾌한 감정이 속에서 욱하고 치밀었지만 그것들을 여과 없이 표출하면 지나고 나서 내가 더 괴롭다는 걸 알기 때문에 누나에게 애교를 부리고 어깨를 주무르면서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 누나는 그런데도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감정선을 지킨 채로 화를 냈다. 누나는 누나가 서있는 곳 반대편에서 내가 내민 손을 거절한 것이다.


얼마 전 여동생 결혼식이 파할 때쯤에도 큰누나는 그런 태도로 말을 하는 바람에 셋째 누나와 말싸움을 했다. 뭐, 슬플 뿐이다. 누나는 인내심이 짧아져버리고 만 것이고, 다정하게 말하는 방법을 아는 머리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누나가 가난한 개척교회 목회자의 맏딸이자 6남매의 장녀로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사느라, 동생들과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을 수행하며 사느라 생긴 굳은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내 라인인 나는 그 수혜를 분명히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입었고, 그런 누나를 탓하고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슬프다.


엄마는 나보고 그 부분에 대해서 누나한테 좋게 잘 말해보라고 하셨다. 자기는 너무 무섭다고. 요즘 들어 둘 째누나도 나한테 큰 누나 말 때문에 상처될 때가 많은데 너는 괜찮냐 그러고 같이 살던 막내랑은 늘 서로 안 좋았고.


스타벅스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점심을 다 먹고 누나는 옥수수를 사서 내게 줬다. 경동 시장 들르면 자주 사 먹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역 방향이니 서울역에 같이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배려를 해주고 혼자 엄마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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