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
옆집에서 하루 종일 전화벨 소리가 났다. 늦은 오전부터 저녁 전 오후까지 내내. 7시간 정도 청소, 정리를 하는 동안 전화가 오는 소리가 자주 간헐적으로 계속 났는데도 전화기 주인은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엔 무슨 일이 난 걸까 싶어 문을 두드려 보려다 말았다. 공용 공간에 옆집남자가 널어놓은 듯한 빨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래 깨지 않고 잘 수가 있는 것인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틀 전 601호 남자를 엘리베이터에서 본 것을 마지막으로 6층에 사는 사람 세 명을 모두 알게 됐다. 모두 남자인데, 나와 옆집남자를 빼면 두 명은 나이가 제법 있다. 그래서 빨래의 내용을 보고 옆집남자가 넌 것인 줄 알 수 있었다.
저번엔 6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문득 다른 층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살까 궁금해서 4층, 5층 복도를 지나가면서 보고 올라갔다. 그때 처음으로 다른 층이 6층과는 구조가 다른 것을 알게 됐다. 6층은 복도 왼편에는 넓은 테라스 공간이 있다. 그건 꼭대기 층이어서 그런 것이었다. 나머지 층은 전부 복도 왼편에도 방이 있었다.
복도에 짐을 두는 세대가 없어 깔끔한 것도 그래서였다. 6층의 세대수 자체가 다른 층의 반보다도 더 적어 애초에 짐을 둘 사람이 적다. 그뿐 아니라 테라스 공간 때문에 다른 층보다 복도가 조금 더 좁아서 짐을 복도에 두면 지나다니는데 방해가 되니 그럴 엄두를 낸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에 감사하다. 싱크대 위 전등을 교체해 주러 오셨던 분에 따르면 꼭대기층은 다른 층보다 층고도 조금 더 높은 모양이던데 거기에도 감사하다. 오늘같이 햇빛이 쨍쨍 좋았던 날, 테라스 공간에서 매트리스 커버와 다른 빨랫감들을 순식간에 건조시킬 수 있던 것도 감사했다. 방을 구했을 때도 몰랐고, 사는 동안도 넉 달 동안은 모르고 지냈지만 모두 내가 고른 매물이 운 좋게 꼭대기 층에 있었던 덕이다. 감사하다.
금요일에 1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학교에서 곧장 둘째 누나 집으로 향했었다. 누나는 밤늦게까지 통역 일 때문에 우리 학교 행사장에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험이 끝났지만 하루 정도 축배 드는 것을 뒤로 미뤄두고 부평으로 가 조카 돌봄을 했다. 놀아주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와글와글 숲 속의 음식가게] 시리즈 일곱 권을 모두 읽어줬다. 네 권째부터는 목이 아파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밤 10시쯤 되어서 조카가 엄마, 아빠 언제 오냐며 식탁 밑에 들어가 졸린 티를 못 감추고 있을 때 매형이 도착했고 조카 양치는 미리 시켜놨기 때문에 둘은 곧장 잠을 자러 갔다.
그리고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아침에 국제도서전을 관람하러 코엑스로 갔다. 일행과 재밌게 관람을 마치고 나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종강 보상으로 내가 먹고 싶던 메뉴를 골라서 맛있게 먹었다. 저녁에는 지난 며칠 동안 밤까지 무더웠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했다. 공기가 아주 가볍고 산뜻해서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연신 "아, 시원하다."는 말이 나왔다.
토요일에는 오늘 자정이 되기 전에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오늘 아침 8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마지막에 6시와 7시에 잠깐씩 잠이 깨긴 했었지만 바로바로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확실히 잠이 깨서 시계를 봤을 땐 8시 14분이었다. 이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건 올해 들어 두 번째 정도인 것 같다. 푹 잔 게 너무 뿌듯하고 좋았다. 그리고 나서는 머리맡에 둔 다이어리에 아침을 시작하는 감사 거리를 쓰고, 오늘 할 일을 썼다. 미뤄둔 옷장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수면의 여운을 즐기면서 잠깐 멍을 때리다가 일어나서 옷장 전체를 갈아엎었다. 철 지난 옷을 따로 정리해서 모으고, 흩어져있는 여름옷도 전부 카테고리별로 다시 정리했다. 티셔츠도 전부 다시 깔끔하게 개서 세로 수납 형태로 새로 정리했다. 그동안 옷장을 열 때마다 갑갑했는데도 시험 기간 핑계 대고 미루다가 깔끔하게 정리를 하니 앓던 이가 빠진 듯이 후련했다.
그리고 나선 화장실 락스 청소를 했다. 물청소를 매일 아침 샤워 후 하는데도 제법 더러웠다. 다이어리를 쓰는 순간 들었던 '오늘은 내 방 환경을 정비하는 데 올인하자'는 충동 때문에, 화장실 벽과 바닥의 줄눈을 솔로 빡빡 문지르고 거울, 세면대, 변기 구석구석까지 모두 하얗게 청소했다. 그 과정에서, 선물 받았던 가루형 디퓨저가 담긴 유리병을 깨버리는 바람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 10초 정도 안 좋은 기분에 사로 잡혀 있다가 올라오는 디퓨저 향을 맡고 나서 기분이 괜찮아졌다. 깨진 유리를 두꺼운 종이가방에 잘 담아서 쓰레기봉투에 넣고 화장실 청소를 마무리했다.
오염된 이불을 빨다가 매트리스 커버까지 오염이 있는 걸 확인하고 하는 김에 커버 두 겹까지 빨아 버렸다. 세 시간 가까이 되는 삶음 빨래 코스를 끝내고 나온 하얀 매트리스 커버에서 새로 산 세제의 향긋한 향이 났다. 그 냄새를 맡으니 또 기분이 좋아졌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책상과 책장 정리를 했는데, 책장도 거의 갈아엎었다. 옷장과 마찬가지로 책장도 그동안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정리가 똑바로 되어 있지 않아 계속 거슬렸던 부분들을 싹 해치웠다. 말 그대로 무언가 죽이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 마냥 살기등등한 기세로 정리정돈을 했다. 정리가 끝나고 나서는 적장의 목이라도 친 듯 짜릿한 승리감이 들었다. 책장은 학교 생활과 관련된 것들, 고립은둔청년 지원 사업 프로그램과 관련된 것들, 봉사 활동과 관련된 것들, 마음을 아릴 정도로 따뜻하게 만드는 추억과 관련된 것들, 아직 읽지 않은 것과 다시 읽을 필요 없는 것, 가까운 데 두고 종종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구급상자 등 구분해서 정리했다. 물건 둘 곳을 새롭게 구분하기도 하고, 쓰지 않는 것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필요 없는 것들도 과감하게 버렸다. 어디서 뭘 준다고 해도 받아오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냉장고도 청소했다. 음식은 먹어서, 선반은 행주로 치웠다. 저녁 먹고 설거지까지 미루지 않고 바로 하고 난 다음에야 누워서 쉬었다. 왜인지 대청소를 할 땐 중간에 쉬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뭔가 불끈불끈 얼른 청소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늘 그랬다.
잠깐 쉬면서 누워 있으니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싶어졌다. 오늘은 운동도 안 하고 외출도 안 했으니 따릉이를 타고 중랑천으로 마실을 가서 수변 공원 벤치에 앉아 글을 쓰자 싶었다. 따릉이를 타고 중랑천변을 달리니 바람이 어제만큼 최상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주 기분 좋게 온몸을 누르듯이 스치며 지나갔다. 따릉이 반납 시간에 걸려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몸만 벌레들에게 내어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니 기분이 좋았다. 따릉이 정기권을 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청소나 정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해야 할 일도 처리했다. 무턱대고 진행하지 않고 다시 한번 잘 확인한 다음 진행했는데, 작년 연말에 LH 청년전세임대 신청하면서 겪었던 경험에서 절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실수에서 배운다거나 성장했다거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늘 책장 정리를 하면서 내가 전에 썼던 이런저런 것들을 다시 읽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말 같이 낯설면서도, 그 기록을 남기던 때의 내 눈으로 보던 것들이 다시 생생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이상하게 일요일처럼 느껴지지 않던 오늘 하루의 일도 이렇게 기록해 남겨둔다. 디지털 청소나 정리를 하다 펼쳐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