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3
셋째 날
내가 집에 내려온 첫날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좀 더 오래 있다 가지 않고 왜 이렇게 빨리 가"냐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애틋한 자식 사랑은 알지만, 뒤늦게 다 큰 성인 노릇을 하기 위해 열심히 성장 중인 나에게는 물리적 독립도 필요함을 알기에 원대로 해드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상 3일째가 되니 '엄마가 아쉬워하니 더 있다가 올라가도 괜찮고'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 생각의 원천은 기차표 예매 하기 귀찮음임을 인지하고 오후 3시 기차를 예매했다.
다른 남매들이 왔다 갈 때도 부모님 두 분 다 늘 "식사는 하고 가지"라고 하시기 때문에 점심 먹고 여유 있게 출발할 수 있는 시간으로 기차표를 예매했지만 점심식사는 혼자 했다. 마지막이라고 엄마가 감정적이게 되는 것 보기도, 식탁이 유난스러워지는 것 보기도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기차역으로 운전해 갈 때는 '아 그래도 다음에 집에 오면 엄마 마음을 버틴다고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잘 받아 보자.'는 다짐을 하며 반성을 했다. 점점 의식과 행동의 목표 단계가 올라가면서 난이도도 상승하는 것 같다.
역에 도착해서 운전대를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있으면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요구하는 게 많아지니 후련한 마음도 있는 눈치였다. 첫째 날이 가장 반가운 법이다. 소비자행동론 때 들었던 해석수준이론은 정말 훌륭한 이론임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기차 안에서 내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분이 자리를 비켜주고 내가 들어갔다. 융통성은 내가 발휘할 때는 좋지만 남이 발휘할 때는 달갑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나와 같은 줄에 앉아 있던 노부부에게도 어떤 청년이 와서 "여기가 제 자리예요."라고 말했다. 노부부는 알고 보니 30분 뒤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이었는데 일찍 타는 바람에 무임승차를 하게 된 것이었다. 나도 달 가는 교통 기술이 익숙지 않아 곤란함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취방에 도착해서 환기를 시키고 자잘한 짐 정리를 해놓은 다음 지하철을 타고 둘째 누나 집으로 이동했다. 내가 방학이라 부모님 댁 간다고 하니까 "갔다 오면 누나 집에 와서 좀 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운전 연수도 좀 해주지 않을래"라길래 방학 알차게 보낸다 생각하고 곧장 다시 이동했다. 접근성이 좋아 지하철로 이동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따져 보면 본가 가는데 기차로 한 시간 반, 누나 집 가는데 전철로 한 시간 20분이라 생각보다 만만찮은 일인 것 같다. 그래도 생판 남도 돕겠다고 자원봉사를 하는데 가장 가까운 피붙이를 돕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선택이 달라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또봇 브이를 8개를 보고 싶었는데 3개밖에 못 봐 억울한 조카 녀석에게 이득 프레임을 씌워 달래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생각보다 잘 통했는데, 이번 학기에 배운 걸 요긴하게 잘 써먹은 것 같아서 즐거웠다. 누나는 내가 괜찮다는데도 컬리에서 산 냉면을 저녁으로 대접해 줬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엄마나 누나나 내 말은 안 들어주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떨칠 수 없었다.
누나는 화요일에 일을 다녀온 데다가 생리까지 시작되어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였고, 최근 조카의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너무 대접받는 것 같아 미안하고 내가 오면 누나가 그만큼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누나는 내가 와서 자기가 그렇게 하게 되는 의욕이 생기는 게 좋다고 한다.
나는 내가 누나를 돕고 싶다. 누나도 나를 돕고 싶다. 그러다 보면 저녁을 먹을지 말지부터 설거지를 조금 하는 것, 음식값 계산하는 것까지 여러 사소한 결정들에서 그 마음들이 상충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에게 줄지, 상대방이 내게 주길 원하는 대로 받을지의 문제에서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마음이야 그렇다 치고 누나가 손님방에 깔아 놓은 이불 위에 몸을 뉘이니 몸이야 더없이 안락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