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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재시작

by 온호

방학 넷째 날

아침에 둘째 누나 부부와 함께 조카를 등원시키고 누나 운전 연수를 조금 했다. 매형이 전날 일일 보험을 들어놓아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는 내가 운전을 해서 갈 수 있었다. 도착해서는 운전자를 교체하고 시동 켜는 것부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 학원 가서 돈 주고 연수받은 걸로 아는데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알려줘야 했다.


도로에서 연습한 것이 아니어서 긴장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짜증 낼 일도 없었다. 하지만 누나가 자신이 코너 돌 때 핸들을 늦게 푸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조금 답답함을 느끼긴 했다. 처음 할 때는 숙련자에게는 이해받지 못하는 초보자 자신만의 느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그 설명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운전 연수받았던 경험이 몇 년 안 된 경험이기 때문에 다행히 누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운전은 어차피 자기가 하면서 익혀야 되는 거고, 조수석에 앉아서 이리 해라 저리 해라 한다고 당장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일단 겁먹지 말고 자신감 가질 수 있도록만 격려해 줬다. 내가 원래 호들갑도 없고 겁도 없는 편이라서 그냥 조용히 누나 마음대로 몰도록 냅뒀는데 그게 누나한테는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주차할 때는 기어를 꼭 잘 확인하라는 거만 강조를 했다. 별 것도 안 했지만 두 시간이 홀랑 가버렸고 누나는 지쳤는지 집으로 가자고 했다.


유치원이 누나 집에서 도보로도 얼마 되지 않지만, 누나는 여러 육아 사정상 본인이 등하원만이라도 차로 운전해서 시킬 수 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잘 연습해서 안전하게 다닐 수준이 되길.




방학 끝

7월 1일부터 하계집중근로로 근무가 시작된다. 내일이다. 그래서 나한테는 오늘까지가 실질적인 방학이다. 그동안 방 정리부터 시작해서 10년 넘은 지갑도 새로 바꿨고 다리가 끊어진 안경을 대신할 새 안경도 맞췄다. 만날 사람들도 만났다. 25-1학기 성적도 받았고, 근로가 시작되기 전 모든 정비가 깔끔하게 끝났다.




요즘 신체 피로가 좀 쌓여서 어제까지는 푹 쉬며 회복을 했고, 오늘은 자체 방학 마지막날을 의미 있게 보내보고자 서울둘레길을 다녀왔다. 스탬프도 찍을 겸 가까운 불암산코스를 갔는데, 집에서 스쿼트를 하고 출발지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것까지 더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하이킹을 해서 그런 것인지 상당히 힘들었다. 서울둘레길 8군데 정도를 갔는데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체력 단련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서울여대가 바로 근처에 있길래 온 김에 캠퍼스 투어도 하자 싶어서 들려봤다. 여대 출입을 굉장히 꺼리는 분을 봤어서 그런지 나도 막상 입구에 다다르니 막연한 겁이 났다. 다행히 저녁 8시 이후로만 외부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서 들어가서 서울여대 캠퍼스는 어떻게 생겼나, 어떤 분위기려나 잘 구경하고 나올 수 있었다. 아직 못 가본 캠퍼스가 많아서 오늘처럼 이렇게 유람 삼아 종종 구경 다니면 재밌을 것 같다.




내일부터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장소로 일을 하러 가지만 이제는 뭔가 새로운 곳이나 새로운 것을 맞닥뜨려야 할 때도 딱히 별 생각이 안 든다. 변하면 변하는 대로 금방 또 적응해서 지내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다. 2년 동안 이런저런 굳은살이 제법 생긴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하다.


오늘 서울둘레길 산길을 다 돌고 내려와서 큰 도로 옆 인도 위를 걸을 때였다. 오래 걸으니 힘들어서 내 발을 보고 있는데 문득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 엄마가 몇 년 전에 사다가 신발장에 넣어 놓은 신발인 게 생각났다. 다른 좋은 운동화가 많아 신지 않다가 그 신발들이 헤져서 이사할 때 싹 버리고 집에 있던 걸 챙겨 온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10년 세월 동안 늘 아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기를, 학교를 다시 다니기를 바라면서 한번씩 새 신발을 사가지고는 신발장에 넣어두곤 했었다. "밖에 갈 때 신어야지, 나갈 때 새 신발이라도 있어야지." 하면서. 그럴 때마다 나는 신경질이 나고 마음이 답답했지만 결국은 엄마가 맞았다. 그렇게 신발장에서 몇 년이나 머물렀던 신발을 잘 챙겨 왔었는데, 이제 그것도 슬슬 힐컵이 닳고 있다. 인도 위에서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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