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비가 많이 오는 것 때문에 내가 겪어야 했던 불행이라곤 출근길에 바지나 셔츠가 평소 이상으로 심하게 젖는 것뿐이었다.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물난리로 고통받고 있는 것에 비해 얼마나 안전하고 사소한 일인지 모르겠다.
안전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나는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중 기록으로 남길만한 것이 '어제부로 3개월 간의 일경험이 끝나서 호주 여행을 간다는 여자애' 밖에 없다는 것에서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김에 몇 가지 더 생각해 봤다.
1. 잦은 비소식에 창문을 닫아 놓고 다녀서 통풍이 되지 않는 바람에 생긴 복슬복슬 하얀 솜 같은 곰팡이를 신경 쓴다든지(화분)
2. 아침 식사를 위한 재료들을 냉동고에 미리 준비해 뒀다든지
3. 생애 처음으로 트럭에서 파는 전기 통닭을 먹어봤다든지
4. 생애 처음으로 주식 수익실현을 조금 해봤다든지
5. 정리수납 1급 자격증을 받는 데에는 노력과 실력보다는 돈 9만 원이 필요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든지
6. 뮤지컬을 봤다든지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 중에서 바로 어제의 일과 뮤지컬 봤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내가 일하는 곳에는 일경험 청년이 한 명 있었다. 3개월의 기간이 끝나서 어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나와는 2주 정도밖에 함께 근무하지 않았고 남아있는 인원도 많아서 그렇게 특별한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세 시에 퇴근하는 일경험 청년 덕분에 점심시간 이후부터 여섯 시 퇴근까지의 시간 사이에 경계선 하나가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사라지게 됐다. 그 경계선을 기준으로 심리적으로 오후 근무 전반, 후반이 나뉘면서 덜 힘들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세 시쯤이 되면 나도 덩달아 한 번 '끝났다'는 느낌이 들면서 긴장이 풀리고 쉬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3개월밖에 일하지 않아서 그런지, 직원들도 매일 교대 근무여서 다 같이 뭉쳐 있지 않아 그런지, 특별히 이렇다 할 환송 의식은 없었다. 여직원 한 분이 "몰랐다"며 멋쩍은 웃음을 최대한 밝게 지었고 고생했다는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8개월 간의 유치원 근무를 마치고 떠나던 날을,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2주 전인 7월 6일 일요일에 뮤지컬 "팬텀"을 봤었다. 어쩌다 보니 갑작스레 그렇게 됐다.
나는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영화 "오페라의 유령"을 봤었는데 그 후로 "The Music of the Night"를 흥얼거리는 일이 생기곤 했다. 1년인지, 2년인지 아니면 5년인지 모르지만 그 안에 한 번씩은 꼭 그 노래가 절로 떠올라 가사도 없이 음만 가지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요즘에 볼 만한 영화가 뭐가 있나' 찾다가 영화는 보고 싶은 게 없길래 뮤지컬도 검색을 해봤는데 "팬텀"이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을 "The Phantom of the Opera"가 아니라 "Phantom"으로 번역하는 것을 어디서 봤던 적이 있어서 나는 "팬텀"이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것인 줄로만 착각해 버렸다. (아마 전에 봤던 그 게 "팬텀"이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공연장에 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니고 가사가 잘 안 들릴 것을 대비해 가사를 미리 찾아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공연 중인 뮤지컬 목록에서 "팬텀"을 봤을 때 10 몇 년 전부터 무의식적으로 좋아해 온 노래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지내던 동안에 자주 영상으로 보곤 했던 박효신이 에릭 역까지 맡았다. 그래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장 빠른 공연 일자를 선택해 좌석을 고르고 결제를 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가 묘사하던 '연극을 관람하러 온 군중'의 모습들이 하나도 변한 것 없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게 왠지 재밌었다.
유일하게 한 자리 남아있던 S석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가사가 잘 안 들렸다. 고음에서는 특히 심했다. "오페라의 유령"을 볼 때는 예매를 미리 계획해서 최대한 앞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공연 자체는 굉장히 즐겼다. 박효신이 너구리 개그를 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고, 에릭이 "그 어디에"를 부를 때 공연장 공간 전체에 알 수 없는 큰 압력이 가득 차는 것도 굉장히 놀라웠다. 크리스틴 다에는 과연 팬텀도 반할만한 천사 같은 목소리였다.
24-2학기에 수강한 "무대 위의 세상"과, 25-1학기에 수강한 "클래식 음악 산책"이 관극의 관점을 넓혀줬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발레, 오페라 챕터를 거쳤던 것이 영향이 있었다. 사실 대학 교양 강의는 겉핥기 중의 겉핥기라고 생각하지만 겉이라도 핥아본 것과 아무것도 핥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번에 예매 내역을 확인하며 10개월 만에 뮤지컬을 보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시간이 그만큼이나 흐른 줄은 몰랐다.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던 뮤지컬 관람이었다.
프리랜서 누나가 굉장히 잘 나가기 시작한 바람에 나는 최근 주말에 조카를 보는 일이 잦다. 지금도 누나집에 와있다. 어제저녁에 퇴근을 하고 바로 이동해서 이틀밤을 보내고 가게 됐다. 아마 학생 신분인 이번 학기까지가 육아 보조 인력으로 기용될 수 있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 내가 조금 고단한 순간을 보내는 것이 시간이 지났을 때 후회가 덜 남는다는 것을 안다. 시간이 지나 가족과 이별하게 됐을 때, 떠나간 가족을 떠올릴 때, 흘러간 시간 앞에 무력감과 허망함을 느낄 때 나를 지켜주는 건 그 시간들 안에서 또렷이 보이는 나다. 그리고 또렷이 보이려면 힘들었어야 한다. 그 힘든 건 나쁜 힘듦이 아니다. 좋은 힘듦이다.
'내 애는 언제 보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