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
어제 나는 일종의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겪었다. 내 오른쪽 아래 사랑니 뿌리가 턱뼈에 붙어있었다고 그러니까 아무튼 뼈에 사무친 것이다. (사무치다: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다)
"뼈저린 후회, 뼈에 사무치는 고통, 뼈 빠지게 일하다, 뼈를 깎는 노력, 분골쇄신..."
괜히 뼈 생각도 해 본다.
'사랑니'라는 소제목에 알맞게, 뽑아낸 내 사랑니를 찍어둔 사진을 오늘 글의 커버이미지로 쓰고 싶었지만 그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유발할 수도 있을 듯하여, 커버 이미지로는 내 사랑스러운 레몬청으로 대체해 본다.
좌우지간 사랑니를 뽑았다. I had my two wisdom teeth removed. 내 남은 사랑니는 하나이기에 이 문장을 영어로 말해 볼 일은 내 남은 생애 다시없을 것이다. 그래서 말해보고 싶다. "I had my two wisdom teeth removed." 두 번째 문장은 한국말로 '아팠다'는 뜻이다.
올해 초 받았던 건강 검진 치과 영역에서 의사 분은 내 오른쪽 아래 사랑니를 보고 "이건 뽑으세요."라고 했다. 아프진 않았지만 뽑으라니까 뽑아야겠구나 하고 있었는데, "그거" 뽑는데 몇 달이나 걸렸다. 쇠뿔도 단김에 뽑는데 내 사랑니는 다 식고 뽑았다. 마침 어제 오전에 기술 교육원 면접 일정이 있어서 근무 스케줄을 빼두었는데, 그 김에 병원도 가게 되었다. 면접 일정이 없었으면 얼마나 더 뒤로 밀렸을지 모를 일이다.
엑스레이 찍고, CT 찍고 진찰을 받았다. 그 결과 사랑니 옆니가 사랑니 때문에 썩었다는 걸 알게 됐고 신경치료를 먼저 받게 됐다. 치료비 안내를 받으면서 마음이 복잡했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다 싶다.
신경치료에서는 아주 험악한 것이 내 치수강이나 치근관을 무자비하게 쑤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섬뜩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캄캄한 와중에 내 눈 아래 어디쯤의 부위를 뾰족하고 기다란 무언가가 죽일 듯이 후벼대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를 쑤시는 의료 도구는 상상 속에서 바늘도 됐다가, 못도 됐다가, 드릴이나 톱이 되기도 했는데, 그런 상상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다음에는 메이요 스탠드 같은 것 위에 놓여 있던 도구를 미리 봐두어서, 그 정확한 모양을 눈꺼풀에 덮여 캄캄한 시야 위로도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신경 치료 이후에 사랑니 발치가 시작되었다. 짜르고 땡기고 부수고 하면서 진도가 그래도 나가는 것 같더니 마지막엔 특히 좀 더 원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의사분이 "마지막 뿌리가 턱 뼈에 붙어있다."는 말씀을 하시고, 중간중간 용을 쓰면서 "이야"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걸 봐서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단단히 박힌 못을 힘없는 못뽑이로 뽑는 것마냥 턱이 들썩들썩거렸다.
그래도 수술 내내 "딱" 소리나 "드드득"소리가 조금이라도 날라 치면, 치위생사 분이 "드드득 소리 날 거예요. 괜찮아요."하고 알려주셔서 겁먹거나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공포와 다정함이 공존했던 인생 첫 사랑니 발치를 그렇게 마쳤다.
위쪽 발치는 수월했다. "위쪽 사랑니는 보통 잘 나오는데 뼈가 좋으시구나." 하면서 의사 분은 두 번째 시도를 하셨고, 다행히 그 걸 마지막으로 치아가 잘 뽑혀 나온 것이다. 고통의 시간이 끝났다는 기쁨과, 이런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어이없음, '산통에 비하면 별 거 아니겠지'하는 생각 등 여러 감정이 섞여서 입을 헹구면서 웃음이 났다. 마취된 쪽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12시쯤 치과를 나왔는데 지혈 때문에 3시 정도까지는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식후 30분에 약을 먹으라고 써져 있어서 점심때를 놓친 김에 저녁때까지 기다렸다. 낮잠을 두 시간 잤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거즈와 함께 약을 삼킬 위험이 없어졌을 때(2~3시간 동안의 지혈을 마친 후)는 약을 한 번 먹어주는 걸 권장한다고 설명지에 적혀있었다. 그 걸 읽어봤어야 했는데, 읽지 않는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그 탓에 마취가 풀리면서 찾아온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버렸다. 그러자 약간 신경질적이고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다행히 저녁을 먹고 나서 약을 먹으니 통증이 거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볼을 살짝 깨물고 있는 것 같은 통증 정도였다. 낮잠을 두 시간이나 자서 못 잘 줄 알았더니 9시도 전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새벽 3~4시 사이에 깼다가 다시 1시간 정도 잤다. 수술 덕에 잠을 많이 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퇴근 후에 발치한 자리 소독을 했다. 총 5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치과를 나오면서 왼쪽은 사랑니가 하나만 났음에 감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있을 신경치료와 나머지 사랑니 발치, 충치 치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의 길을 정리했다. 치과를 갔다는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앞으로도 잘 다녀야겠다.
레몬청 사진을 보며 놀란 가슴과 지친 심신을 달래 본다. 보기만 해도 좋아지는 기분과, 며칠 후면 맛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