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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세례식

by 온호

등굣길에 나선 지 30초 만에 비가 아주 대차게 쏟아졌다. 다행히 우산은 챙겨 나왔지만 신발과 바지, 반팔티 왼쪽 소매가 다 젖어버렸다. 나는 발이 젖는 게 싫어서 나도 모르게 자꾸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한껏 오므렸다. 소용없는 발악을 하고 있는 내가 웃기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가락을 쫙 펴고 걸었다.


학교에 도착해서 강의실을 찾아갔다. 이미 학생들이 많이 와있었다. 개강 첫 시간에는 출석 체크는 하지만, 수강 정정으로 들어올 학생들을 배려해서 진도를 나가거나 출석을 성적에 반영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첫 시간엔 강의실 빈자리가 많은데, 이번엔 굉장히 낯설정도로 학생이 많았다. 강의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이 돼서 안심 됐다.


생각보다 길었던 오티가 끝나고 교수님이 말한 복사실에 교재를 사러 갔다. 그리고 우산을 바닥에 두면서 '까먹지 말고 챙겨 가야지.'하고 생각했는데, 책값을 결제한 카드를 받아 다시 지갑에 넣으면서 까먹고 그냥 나와버렸다. 도서관에 한 시간 반을 머물렀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왔을 때 우산이 없다는 걸 알았다. 며칠 전 양산을 하나 따릉이 바구니에 놓고 잃어버리고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에 또 우산을 놓고 그냥 간 것에 속이 상했다. "물건을 잘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우산 챙기는 걸 그만 또 깜빡해서 네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실망스러운가 보구나. 그래서 속상하구나." 우산 챙기러 가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줬다.


복사실에 가니 우산이 위에 올려져 있었다. 말없이 그냥 챙겨가면 주인이 잘 찾아갔는지 모를 테니 사장님에게 "우산 챙겨갈게요."하고 말했다. 뒤돌아 일을 하시던 아주머니가 "바닥에 두면 누가 가져갈 거 같아서 옮겨놨다"고 하셨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우산을 무사히 찾은 후에 곧바로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는 이동해 학과 행정실로 갔다. 업무 시간을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메모장에 메모해 간 다섯 가지 질문을 빼먹지 않고 모두 했다.


상담을 마치고 강의실로 이동해서 다시 오티를 듣고, 오티를 다 듣고는 도서관에서 오후 근무를 했다. 오랜만에 도서 정배열을 하니 속도가 느려진 것인지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저녁을 먹고 갈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배고플 것 같아서 밥을 먹고 주민센터로 따릉이를 타고 출발했다. 소득증빙과 재학증명을 해야 했다. 주민센터를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상정한 것보다 조금 빨라서 안심을 했다.


그리고 다시 따릉이를 타고 기술교육원으로 출발했다. 지하철 동선이 비효율적이어서 수변 공원길을 따라서 쭉 이동하는 자전거 동선이 훨씬 시간이 적게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변 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제때 진입하지 않아서 되돌아가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거기에 약간 답답함을 느꼈지만 아직 시간 여유가 많아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수변 자전거도로에 무사히 도착했다. 직선코스에서 앞만 보고 갈 생각에 신나서 페달을 몇 번 힘차게 굴렸다. 그러자마자 30초 만에 비가 아주 대차게 쏟아졌다. 그런데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전거를 계속 타야만 했다. 따릉이 반납할 곳도 없고, 택시를 타러 나갈 곳도 마뜩잖아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책가방 지퍼가 고장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안에 든 노트북이 젖을까 가방을 앞으로 메고 우산을 그 위로 드리웠다. 하필 오늘 마지막 강의 끝나고 가방을 싸면서 하나 남은 멀쩡한 지퍼까지 고장났었는데, 비가 와버리다니.


그 상태로 자전거 도로 위의 깊은 물웅덩이들만 피해 가면서 끝까지 이동했다. 이미 등이 자전거 바퀴에서 감겨 튀어올라온 흙으로 젖었고, 바지도 팬티까지 다 젖었기 때문에 그게 크게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갈 일인가'싶은 생각도 중간에 들었지만 일단은 첫 수업부터 지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표출하고 싶어서 이렇게 드라마틱한 궁상을 떨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책임감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좋게 결론지었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다행히 비가 그쳤다. 끝까지 비가 내리지는 않은 게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목적지 근처에서 따릉이를 반납하기 위해 따릉이 대여소를 찾다가 또 한 번 헤맸을 때는 안 감사했다. 그리고 따릉이 바구니에 우산을 또 두고 자리를 떠났다.


기술교육원에서 오티를 다 듣고 과 밴드에 가입한 후 교실을 떠났다. 그리고 우산을 두고 왔던 따릉이 대여소부터 찾아갔다. 또 살짝 길을 헤맸다. 이쯤 되니 징글징글하다는 생각이 울컥 올라왔는데 오래가지는 못했다. 2초도 안 돼서 기분이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네이버지도를 보니 파란색 점이 파란색 선 밖 하얀 공간에 있었다. 집 바로 앞에서 내리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서 하나 더 간 것이었다. 하나만큼만 더 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화가 나거나 억울하거나 자책하거나 하지 않고 시종일관 '이만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는 게 감사했다. 첫 날이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생활 패턴의 동선을 닦아놓느라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집에 도착해서 내가 만든 레몬청에 탄산수를 타서 벌컥벌컥 마시는 일을 참을 수는 없었다. 위로도 좀 필요했다.


심장에서 먼 곳부터 천천히 적시세요.


비가 내 머리랑 발바닥 쪽부터 적셨으니, 안전하게 몸을 새 물 온도에 적응시킨 셈이다. 새로운 학기 시작을 맞아 누군지는 몰라도 세례식을 친절히 치러주는 것 같다. 첫날 예열을 든든하게 했으니 남은 4개월은 무탈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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