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죄책감

#정배열

by 온호

오늘은 아주 즐거운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의심을 품고 있던 일을 확인할 방도가 없는 탓에 답답해 해오기만 했는데 의심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몇 개의 우연이 겹친 덕에 찾아왔던 것이다. 이 일을 나는 경사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내가 속한 도서관 부서의 국가근로장학생들의 주된 업무는 '도서배가 및 서가정리'이다. 책 꽂기와 책장 정리라는 뜻이다. 매일 지정된 시간마다 총 세 번 배가를 하고 본인 담당 서가의 정배열을 확인해야 한다. (정배열은 '이용객들이 자료를 열람하는 과정에서 섞이거나 잘못 꽂힌 책들을 청구기호 순서에 맞춰 원래의 위치로 바로잡는 작업')

이번에 도서관에서 서고가 통째로 몇 군데 이동하게 되면서 근로장학생들이 모두 투입되어 다 같이 구역을 나눠 정배열을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다른 학생들이 작업을 마치고 인증을 남기기까지의 속도가 여러모로 미심쩍었고 그래서 '어디 내가 한 번 볼까'하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지만, 그렇다고 남의 구역 정배열을 확인하러 다니는 별종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유난히 느린 것인지, 다른 학생들이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책장 상태를 결정 지은 운의 차이인 것인지 자꾸 생각하게 됐다. 그게 아니라 사실은, 다른 학생들이 나만큼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고 대충 볼 거라는 확신에서 오는 억울함 때문에 자꾸 생각하게 됐다. 나보다 열심히 확인하는 것 같은 여학생 두 명에 대해서는 나도 굳이 더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는 만큼 나도 좀 더 열심을 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억울함이든 호기심이든 그런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다른 학생들도 충분히 제대로 확인하고 열심히 하고 있을 건데 괜히 내가 남들보다 일을 더 오래 남아 하는 것이 억울하니까 남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죄책감이 들었다.

새로 옮긴 서고뿐만 아니라 평소에 매일 하기로 되어있는 일반 서가 정배열 확인 작업에 대해서도 나는 늘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재작년부터 그랬으니까 제법 오래된 것이다. 뭐냐면, '책장의 처음과 끝 책 청구기호를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두 꼼꼼하게 다 확인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지정석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거나 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생긴다면 그 시간이 화장실을 가거나 정배열을 확인하는 시간일 텐데 내가 보기엔 그게 그리 긴 것 같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은 로테이션되는 자신의 담당 서가 앞에 서서 천천히 정배열을 확인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유독 자주 눈에 띠지만 그것도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정배열 확인을 하다 보면 이용객이 아니라 배가 규칙을 혼동하고 있는 근로장학생에 의해서 잘못 꽂힌 책을 발견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그 양이 아주 적고 아주 가끔씩만 발견된다는 점에서 잘못 알고 있는 인원은 많아야 두 명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용객이 아니라 근로장학생이 배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책의 배열이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지만 잘못된 규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늘리는 멍청한 구성원이 있다는 것 때문과, 교육이나 설명이 좀 더 세심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보충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 때문에 이런 문제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렇게 도서관 일을 시작한 이후로 오랫동안 놓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요 며칠 더 강하게 느꼈던 의심이나 불만이 오늘 해소가 됐으니 아주 즐거운 날이다. 그건 어제 정배열을 마친 남의 구역을 오늘 내가 직원 분의 지시 하에 자연스럽게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제 해당구역의 정배열을 담당했던 학생이 오늘은 결근한 것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줄을 서서 순서대로 이런저런 업무를 배정받을 때 내 앞에 선 여학생과 나는 어긋난 정배열을 수정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는 두 가지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쁨도 없었을 것이다.

칙칙한 톤의 지하 서고로 이동해서 직원 분이 일러준 특정 책장을 먼저 다시 정배열하고, 오배열된 부분을 새롭게 찾아서 정배열하기 시작했다. 그 구역은 책들이 잘못된 규칙을 따르고 있었고, 서고 이동 서비스 업체의 작업 방식이 궁금해서 오며 가며 이미 확인해 본 나는 그런 배열은 업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너였구나.' 난 드디어 범인을 찾았다.

딱히 섣부른 판단이거나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나는 고민하지 않는다. 내가 도서관에서 처음 일했던 때부터 있었던 학생 중에 지금 남아있는 학생이 그 학생 포함 두 명뿐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꽤 긴 근로 기간 동안에도, 혼동할만한 그 규칙에 대해서 이 학생이 모르고 있다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하게 하는 그녀의 태도와 행동 방식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면, 나는 마음껏 그 학생의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태도와 여러 행동들에 대해 묘사했을 것 같다. 그러고 싶은 욕구가 이는 것은 비난하고 처벌하고 싶기 때문보다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특이하기 때문이지만, 책 속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의 실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다.

그동안의 의심이 생사람 잡는 잘못된 의심이 아니어서 죄책감을 덜었다. 이제부터는 함께 일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 의혹을 품고 있지 않아도 돼서 홀가분하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내 담당 서가에서 오배열을 찾아내는 일보다는 그 반대가 더 쉬울 거라는 자신감에 이제는 분명한 근거를 하나 가지게 돼서 좋다. 무엇보다 해봤으면 하는 일을 해봤다는 게 정말 속 시원하다.

규칙을 잘못 알고 있던 학생에게 직원 분이 따로 설명을 해주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랬던 것 같은 조짐은 있었지만. 헷갈리는 규칙을 전체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넌지시 오배열된 부분의 사진을 찍어뒀다고 말하고 보고 겸 단톡방에 올렸다. 그동안의 혼자만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함이라는 걸 스스로는 알고 있기 때문에, 또 나서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기 때문에 사진을 올리는 일이 찝찝했다. 이 문제를 매듭짓는 내 최선이었던 것 같다.

나랑 짝이 되어 같이 일을 했던 여학생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나 답답함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이는 태도였다. 묵묵했다.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이 일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속 좁고 예민하게 굴었는지, 이렇게나 찌질한 인간인지 알지 못하고 지나갔을 것 같다. 짝을 잘 만난 점도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러고 옹졸하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