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한테 해요!

#시간제한

by 온호
"줄리아한테 해요! 줄리아한테 해요! 내가 아니야! 줄리아야! 그 여자한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단 말이에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고, 뼈다귀가 나올 때까지 해치워요. 내가 아냐! 줄리아한테 해! 나는 안돼!"


졸업하게 되면 학교 도서관을 지금처럼 편하게 이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에 요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책도 훨씬 잘 읽힌다. 자꾸만 꾸벅거리게 되는 오전 10시와 오후 2시쯤에도 졸림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졸면서 카프카 단편선을 읽을 때는 글자 위를 빙판길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미끄러져 내려가곤 했는데 그런 상태에서는 몇 번을 다시 되돌아가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집중이 올라가니 책 읽기 질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다.

시간제한을 느낀 이후로 며칠 사이에 『1984』를 다 읽고 『동물농장』까지 한 번에 같이 읽었다. 『1984』독서노트를 남기다가 "줄리아한테 해요"를 발행할 글 제목란에 쓰는 화면이 보였다. 글자가 하나씩 생기고 커서는 하나씩 오른쪽으로 밀리고. 아마 101호실에서 윈스턴의 '줄리아한테 해요!'라는 말로 완성되는 당의 완전한 승리의 순간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1984』를 다 읽고는 정말 여러 가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노트북 메모장에다 대고 한 이야기를 또 할 흥미가 없어 생략하지만 제목이 떠오른 김에 다른 이야기를 또 하나 남기게 된 건 좋은 일이다.

설연휴 이후에 졸업 전까지 도서관 출근은 며칠 남아 있지만 졸업예정자는 어제까지가 도서관에서 추가 절차 없이 마지막으로 책을 대출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어려워서 미루고 있던 책을 하나 미리 빌려뒀고, 오늘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그냥 책장에서 꺼내서 읽고 있다. 제목만 알 땐 그냥 '익숙하구나' 했는데 직접 읽어보니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 다르게 책이 훨씬 맛있고, 제목의 무게 자체도 온전하게 느껴진다. 남은 출근일수 안에 다 읽을 수 있겠지만 만약에 일이 많아서 그러지 못하게 되면 사서 읽어야지 싶을 정도다.

2010년에 같은 과 여자애랑 학교 도서관에 같이 갈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 가는 장면도 나오는 장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선명하게 생각나는 게 있다. 처음으로 도서관 계단을 올라보고, 그 앞에 원형으로 펼쳐진 자료실의 장엄한 모습을 봤을 때다. "미녀와 야수" 속 벨이 아무리 사다리를 멋지게 밀며 이동해도 턱없이 모자랄 도서관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주 아름다웠고 우러러 볼만했다.

그때 나는 옆에 여자애에게 "와, 여기 책 다 읽고 싶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런 마음조차 얼마나 사리 분별 던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옆에 서있던 여자애는 책을 좀 읽어 본 애였는지 "너 정말 현실성 없는 애구나"같은 뉘앙스의 말을 했었다. 아주 맞게 봤다. 그걸 생각하니 어른스럽고 멋있는 애였다는 기억이 난다.

졸업한다는 생각이 들고나서 도서관에서 책읽기가 잘 되는 걸 보니, 무언가의 주어진 시간이 끝이 보이기 시작할 때 쯤이 되어서야 행동하게 하는 큰 힘이 생긴다는 걸 느낀다. 시험 기간이 있어야 하는 것도 그래서이고 어쩌면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도 그래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