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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r 03.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알아서 좋은 것, 몰라서 좋은 것

맙소사 개강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

올해의 2월은 나름대로 용을 쓴 편인데도 31일까지 있는 달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확실히 짧게 느껴지긴 한다. 2월을 마저 기록해 보자. 지난 글들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꽤 유용했다.


2월 18일에는 파마를 했다. 인생 첫 파마를 했던 것이 2년 전인데 오랜만에 다시 하게 됐다. 스네이프 교수 머리가 될 때까지 버텨볼 심산이다. 대학생 신분일 때만큼 머리 기르기 좋은 기회는 없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히키코모리일 때도 단발을 넘어선 장발이었던 적이 있지만 사진도 없고 기억도 거의 없어서 아쉽다.


파마를 한 18일부터 면도도 하지 않고 있다. 심리적인 리미널리티인가 보다.(리미널리티 Liminality란 민속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어떤 상태나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는 경계 또는 문지방을 의미합니다.)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쓸 때는 전문 용어나 어려운 표현은 피하라는데 인류학 관련된 책에서 처음 본 이 단어가 재밌어서 꼭 직접 활용해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유독 기억에 남을 만큼 처음 접할 때 특별하게 다가왔던 단어들 몇 있다. '소중히 하다'라는 cherish라든지, 위선자 hypocrite,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윤슬까지


소중히 한다라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단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나 예쁜 자연현상에 누군가 앞서 이름을 지어줬다는 게 참 좋았다. 아름답지 않나? 아프리카식 같아서 뭔가 이국적이기도 하고. 위선자의 영어단어는 어릴 때부터 워낙 위선에 대한 충격과 고민이 많았어서 그런지 hypocrite를 처음 단어장에서 봤을 때 반가워서 입에서 몇 번이고 굴리고 놀았다.


리미널리티도 그랬던 단어인 것 같다. 최근 내 상황에 너무 딱 맞지 않나? 인생의 전환점 한복판에 서있다.




최근 룸메가 새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는 똑같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샤워하다가 문득 알게 되고 깨달은 게 있다. 룸메들이 문제인 게 아니라 내 성격이나 마음이 삐딱할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을 만나고 기분도 좋아지고 나니까 룸메에 대한 걱정 불안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찾아온 긍정적인 생각들이 이번 룸메는 저번 룸메보다 훨씬 더 사교적이라 대하기도 편하고 코도 거의 안 골고, 냄새도 안 난다고 말해줬다. 같이 살기 좋은 룸메다. 휴


저번 룸메이트와의 생활 때문에 알게 된 기숙사 생활과 낯선 이와의 동거의 어려움에 대한 경험이 이번 새로운 인연을 스트레스로 인식시켰다.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지난 학기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기숙사였기 때문에 입사할 때 룸메에 대한 걱정은 할 수 없었다. 모르기 때문에. 이럴 땐 모르는 게 약이다.


반면에 아는 게 힘일 때도 있다. 지난 학기엔 개강해서 학교 간다는 생각을 하면 온갖 두려움이 속을 까맣게 덮어버렸다. 하지만 한 학기 다녀본 결과 그 두려움의 상상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임을 알게 됐기 때문에 이번에는 개강을 앞두고 마음이 편하다.


인생에서 알아서 좋은 것들과 몰라서 좋은 것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내 화분! 귀여워

기숙사 방 뺀다고 화분을 셋째 누나 집에 일주일 놔뒀더니 흙에 솜같이 생긴 하얀 곰팡이가 피었었다. 이파리도 많이 상했었고. 커튼을 항상 쳐놔서 햇빛을 못 받으니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입사하면서 기숙사로 다시 데리고 와서 곰팡이도 떼어내고 볕 나는 창에 두니 유독 혈색이 좋아 보인다.   


기숙사 관리 아저씨와 갔던 식당을 지난주에 A와 갔다. 지나다니면서 보기만 했던 사람들의 역할을 이번에 내가 맡게 되었다. '학교 앞 식당에서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는 대학생' 역할. 조금씩 평범해지고 있다는 상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A에게 돌리겠습니다.


다음 날, 오랜만의 자조모임 동아리 활동으로 마곡을 갔다. 나한테는 세상이라는 미지의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한 탐험의 의미가 있기도 한 서울 유람이다. 비장한 것 같지만 사실 마음은 그저 너무 신난다.


마곡에서는 이 글의 커버 사진이 된 한강에서 산책도 하고 좋아하지 않는 메뉴지만 쌀국수도 맛있게 먹었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집필했다는 동굴을 구경한 것도 재밌었다. 아무래도 어릴 때 드라마 허준을 봤었다 보니.

그리고 마포고를 본 것도 엄청 신기했다. 페이커와 데프트의 모교. 아무래도 히키코모리 시절 LOL(리그오브레전드) 신세를 많이 졌다 보니 익숙한 여러 롤 콘텐츠의 무대가 된 장소를 직접 본 것은 특별한 느낌이었다.


생각할 만한 일도 있었다. 한 청년의 사고 트라우마 + 나의 안일함으로 호스트의 계획이 틀어졌다. 한 청년이 사고 트라우마로 터널을 지나갈 수 없어서 목적지로 내가 함께 우회해서 가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입장 마감 시간에 2분 늦어 구경을 못하게 됐다. 누군가의 죄책감과 미안함, 누군가의 속상함과 그로 인한 약간의 짜증 속에서 나의 잘못도 찾아봤다. 또 비슷한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하고 싶을까? 뭐가 더 좋을까?


쉬었다가 볼링장으로 가서 볼링도 처음으로 쳐봤다. 스트라이크도 한번치고 스핀도 넣어보고 재밌게 즐겼다. 볼링이라는 인생의 콘텐츠를 알게 된 건 좋았지만 허리가 아파서 자주 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버거킹을 가서 식사를 하고 카페를 갔다. 늦은 저녁이라 카페인을 피해 나는 초코 라떼를 마셨다. 맛이 없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앞으로 메뉴 선정에 참고해야겠다.


다른 테이블의 청년들은 먼저 파하고 내 쪽 세 명은 남아서 이야기를 더 했다. 알고 보니 가장 절한 삼인방이었기 때문일까? 우연의 일치인지 그렇게 앉게 됐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세 명의 평균 고립 기간이 10년쯤 되는 것 같다. 처음으로 나보다 은둔 고립 기간이 긴 청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나도 군 입대와 짧은 대학생활이 아니었다면 딱 그만큼이었을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청년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지금까지 중에 가장 공감됐다. 내 감정과 생각들이 그대로 타인에게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힘이 됐다. 그 청년의 상담 일화 나에게도 적용이 되기도 했다.


"oo 씨는 엄청 잘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이야기를 하다 이 말을 듣게 된 순간쯤부터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이 가시고 좀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 잘하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걸 까먹고 있었구나. 나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건데 또 어느샌가 욕심이 생겨서 고통스러웠던 거구나. 사랑에 대한 꿈도, 학업에 대한 열정도,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일단은 지금의 단계부터 열심히 해내면 되는 건데.


뭐든지 겉으로만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상태만 보다 보면 부럽고 욕심이 난다는 걸 잠깐 까먹었나 보다.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의 노력과 시간과 고통을 나도 가져야만 그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다시 떠올리며 욕심에 감정을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시 이 글들을 읽으면서 까먹지 않고 또 기억할 수 있게 그때의 생각들을 남겨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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