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월요일, 부모님 집으로 가는 날. 일주일 전쯤 미리 예매를 해둔 4인 동반석에 누나들과 앉아 커피도 마시면서, 과자도 먹으면서 내려갔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커피백으로 커피를 내려서 보온병에 옮겨 담아 갔다. 그냥 커피를 누나들한테 주고 싶었다거나, 내가 마시고 싶었다거나, 사 먹는 돈을 아낀다거나 하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 뭐냐면, 내가 전 날 아차산을 갔을 때 청년들한테 '커피를 준비해 온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보다 누나들에게 '커피를 준비해 온 동생'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더 작다는 걸 인식했다는 것이다. 아빠가 바깥으로는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나, 인류애를 실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면서도 집 안으로는 소홀했던 모습이 떠올라 '아! 나도 그러고 있네!' 하고 생각한 것이다. 가족에게 더 잘, 최소한 똑같이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커피를 가져갔다. 너무 이럴 필요도 없는데..
커피를 종이컵에 따르면서 내 맞은편에 앉은, 가족 사이에 혼자 남인 청년에게도 '한 잔 줄까, 별나 보이려나.' 하고 있는데 다음 달에 만 세 살이 되는 조카가 청년을 가리키며 주라고 하길래 고민을 안 해도 돼서 좋았다.
역에 도착 후, 주차장으로 나와서 아빠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집-역 셔틀 역할을 내가 했었는데 이제 나도 손님 입장이 됐다.
기지개센터 원예활동에 참여하면서 받은 거북 알로카시아와 문샤인 화분을 들고 내려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걸 엄마 원예활동 자리에 보탰다. 이사하기 전 사택에 살 때는 화분이 정말 많았는데 엄마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대부분 정리했던 기억이 있다. 양도 지금 있는 것의 10배는 됐었고, 20년, 30년, 심지어 40년 이상 키운 화분들도 있었으니 정리한 것은 어쩌면 화분이 아니라 엄마의 인생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두고 가야 된다."며 엄마를 채근했던 나지만 그것들을 잃은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엄마 대신 호스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던 순간들, 딸기를 따먹던 여름, 엄마가 가끔 된장국에 넣을 때는 '이걸 도대체 왜 여기에?' 싶던 방아, 손톱에 물들이던 봉숭아, 예쁜 꽃 핀 것 좀 보라며 감성을 주입당할 땐 짜증 나던 철쭉. 화분들은 내 인생이기도 했다.
점심은 집에서 먹고, 저녁은 동네 맛집에 가서 고기를 먹었다. 엄마는 많이 먹이고 싶어서 또 자기 마음대로 많이 주문하고, 큰누나는 저번에도 저러다가 남겼다며 답답해하고 투덜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으면서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하고 누나한테 잔소리하는 상상만 했다. 진짜로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면 자기도 잘 못하면서 말로는 더 성숙한 사람인 척한다는 불쾌한 기분을 누나한테 줄 수도 있으니까. 대신에 나는 고기가 남지 않게 열심히 먹었다. 그럼 둘 다에게 나쁠 게 없지. 가족이 모이는 귀중한 시간은 조심조심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것 같다.
밥을 먹고는 가까운 평생교육원 운동장에서 잠깐 놀았다. 폐교를 개조한 곳인데 오랜만에 가니 건물도, 큰 나무도 너무 감성적으로 보이고 꼭 옛날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장소처럼 예뻐 보였다.
행복과의 거리는 얼마일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지금 여기에서 감사할 줄 알고, 만족하면 된다고. 장소나 사건에 의존하는 행복보다는 오롯이 나 자체로 평온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동의하는 말인데 이 날은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집에서 밥 먹고 가족들이랑 밥 먹고, 내가 나 이외에 유일하게 사랑했던 공놀이도 즐겁게 하고, 8살 때처럼 아빠랑 공도 주고받고 하니까 행복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나도, 아빠도 자랑스럽고 뭉클했다. 오글거린다고 거부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니 행복했다. 행복하다는 걸 깨닫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조금 약간 떨어져 있기도 하네.'
나에게 행복은
KTX로 한 시간 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에게 행복은
가족들이 탄 승합차를 시속 60km로 책임감 있게 운전하는 데에도 있었고
나에게 행복은
아빠 앞에서 플립플랩 자랑하는 데에 있었다.
나에게 행복은
만 2세 조카를 마르세유턴으로 제끼는 데 있기도 했고
이 모든 순간들을 소중하게 사진에 담는 것에 있었다.
아빠와 같이 축구하지 않은 동안 나는 이런 신세대의 기술을 익히기도 했었다는 걸 꼬마처럼 자랑하고, 조카에게는 운동을 잘하는 어른으로서 퍼포먼스의 기준점도 높여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특별한 날에는 학교에 필름 카메라를 들고 가서 친구들 사진을 찍던 어린 시절의 나도 요즘 부활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가치를 분명히 안다는 것은 참 좋다.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공놀이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좋아한다.
7월 30일 화요일은 캠핑장에서 소풍을 했다. 아무래도 조카가 밖에서 놀아야 모두가 편하다 보니 9시 반쯤 나섰다. 물잠자리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고, 조카가 계곡 물에서 너무 잘 놀아서 좋았다. 점심으로 과일이랑 김밥, 보온병에 차갑게 만들어 간 다방커피, 포카리, 대극천 주스 등 뭘 많이 먹었다. 집에 오니까 이런 게 좋다. 아빠 말대로 돈 말고는 다 많다고, 자식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돌아오는 길에는 집에 있을 동안 같이 장 보러 다니던 마트에 가서 엄마가 요리할 재료를 샀다. 마트는 내가 집을 떠난 사이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마트 근처에서 최근 찾은 빵집이 마음에 드셨는지 거기 가서 깜빠뉴를 샀다. 우리밀 빵집. 집에 도착해서는 나는 보냉백 정리하고 쉬었다. 저녁에는 밥 먹고 누나들이 사놓은 맥주랑 과자 같은 걸 같이 좀 먹었다.
7월 31일 수요일
주말에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안 쉬고 월요일부터 집에 내려와서도 가만히 누워서 안 쉬었더니 왼쪽 눈이 충혈되고 잘 안 보이고 피곤했다. 그래서 수요일은 조카 볼 생각도 못 하고 밥 차리는 거 도울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누워서 점심까지 잤다. 그리고 오후에는 글을 하나 써서 올리면서 쉬었다.
그러다가 저녁에 동생이 산책을 가자 해서 "안 갈래." 했다가 집에 누워있어 봐야 웹툰이나 보고 유튜브나 볼 게 뻔한데 그러면 또 나중에 동생이랑 헤어지고 나서 분명히 후회할 거 같아서 "그래 같이 가자." 하고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현명한 선택에 대한 선물로 평생 처음 보는 걸 보게 됐다.
위에서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빛줄기는 종종 보지만,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조명처럼 뻗는 빛줄기는 처음이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분홍색 빛이 세 가닥 정도 보일 때는 동생이랑 "뭐지 뭐지?" 했는데 좀 더 걸어가다 보니 점점 선명해졌다. 둘 다 흥분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는 나중에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 claude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무슨 현상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박명광선이라고 알려줬다. 좀 알아보니 박명광선이라는 게 천사의 사다리, 부채살빛, 틈새빛살이라고도 부르는 흔히 보이는 현상이고 아래에서 위로 뻗는 경우를 반박명광선(anticrepuscular ray)이라고 하나보다. 그러니까 내가 본 건 반박명광선인 거다.
집에 있을 때 허리를 다쳐서 걸을 수가 없어서 재활운동으로 신발 한 개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 다녔던 산책길이다. 그 길을 동생이랑 둘이서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오빠는 그 사람이 왜 좋아?" 동생이 그 애의 전완근이 어땠다느니, 자기를 쳐다보다 들켜서 얼굴이 빨개졌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내 차례가 되었을 때는 제법 신이 났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할 거리가 많았으니까. 다만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품었다는 고통이 언제나 동시에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이 때도 또 조금 쓰렸다. 집에 있어서 힘들 때보다는 이런 형태로 힘든 것이 그래도 인간답다 생각한다.
8월 1일 목요일
집을 떠나는 날. 엄마는 이것저것 챙겨주려 했다. 아빠도. 엄마가 자식 챙기느라 바쁘게 움직이면서 고생하는 걸 보는 것도 그렇고, 괜찮대도 자꾸 같은 걸 두 번 세 번 물어보면서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도 그렇고 그런 것들에 짜증을 내지 않기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다행히 짜증 내지 않고 잘, 엄마 섭섭하지 않게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아 챙겨서 짐을 쌌다.
주차장 출입구로 차가 빠져나갈 때 엄마에게 인사했다. 잘 지내시라고. 이번 이별의 엄마 표정은 같은 경우들 때보다 좀 더 슬펐다. 좀 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계셨다. 외가댁에서 떠날 때 배웅하시던 외할머니의 얼굴 같기도 하고. 외할머니의 표정은 손주나 사위보다는 엄마를 보내야 해서 지어진 표정이었다는 걸 이때 차 안에서 알았다.
서울 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따라 나온 여동생과 운전하는 아빠에게 인사하고 헤어져 역으로 들어가는 길에 혼자 서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전한 집을 떠나와서 그런지, 곧 다시 시작될 유치원 근무나 취업, 새 학기, 새 룸메를 떠올려서 그랬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