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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84번째

by 온호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유치한 거야. 누구도 오빠를 불편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게 아니야."


방어기제를 펼치고 있는 나에게 동생이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었다. 상황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을 뿐, 내가 풀 죽을 일도 아니었고 자포자기할 일도 아니었다. 동생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내 유치한 방어막을 거두고 옹졸했던 선택을 번복했다. 번복함으로써 얻은 결과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른 경로였지만 결국엔 원하던 걸 손에 넣었으니.


금요일에는 기지개센터에서 하는 활동형 체험으로 그룹 PT를 했었다. 유도를 못 가게 된 이후로 오랜만에 사람과 같이 하는 운동이라 너무 재밌었다. 유치원에서 틀어주는 노래 중에서 "혼자 노는 것도 재밌지만 같이 놀면 더 신나죠."라는 내용의 노래가 떠올랐다. 참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들의 대부분이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여우와 두루미 영상을 볼 때도 그랬다. 여우와 두루미가 서로 식사초대를 했지만 접시와 호리병의 차이로 불쾌감만 가지게됐다는 이야기를 다시 볼 때는 정말 놀랐다.


'세상에서 거의 제일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인 걸 이미 배우고 있잖아?!'


호의를 베풀 때에도 상대방을 정말 잘 알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조금 맞지 않는 방식으로 호의를 베풀어도 방식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 많이 볼 줄 알아서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늙어 죽을 때까지 이걸 잘 못하는 사람이 많은 걸 봤을 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음날부터 나에게 돔스(지연성 근육통증, Delayed Onset Muscle Soreness)를 안겨줄 운동이 끝나고 권역 복지관에서 면담을 했다. 앞으로 복지관에서 진행될 프로그램들이나 나에게 도움을 줄만한 목표 세우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떤 내가 되고 싶냐."였던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공기업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일들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면담을 하는 동안, 아니 첫인사를 드리는 순간부터 복지사님께 싹싹하고 쾌활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복지사님은 거기서 편안한 인상을 받았는지 나에게 무언가 기대하기 시작하셨다. 아마 참여자들 사이에서 내가 긍정적인 기류를 만들어줄 거라고 기대를 하셨을 테지만 그걸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건 몇 번 참으셨다. 잘하신 것 같다. 대놓고 말씀하셨으면 나는 아마 어떤 게임의 보상을 받은 쯤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MBTI의 모태가 된 융의 성격유형론에 따르면 NF 유형의 심리적 게임은 "위장"이다. 게임 목적은 "자기소외, 타인기만" 이라고 한다. 나는 상당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참고)

에피메테우스 (SJ) 의 심리적 게임: 불평, 게임 목적: 자기 변명, 타인 곤경, 회피적 책임

종류: 고통호소(하소연), 근심, 현관 발판 되기(자기비판), 자기연민, 우울, 잔소리


디오니소스 (SP) 의 심리적 게임: 등치기, 게임 목적: 자기도취, 타인 처벌

종류: 비행(명예훼손), 가짜 연기, 난폭한 행동, 흥청망청, 겁주기, 허무

아폴론 (NF) 의 심리적 게임: 위장, 게임 목적: 자기소외, 타인기만

종류: 마음읽기, 순교자, 메뚜기 놀이, 동상, 건망, 경련


프로메테우스 (NT) 의 심리적 게임: Robot, 게임 목적: 자기몰입, 타인혼란

종류: '그건 비논리적이야', 초주지적, 좁쌀 깨물기, 미신, 공백상태, 고정 사고에 쫓


혼자 열심히 등산도 다니고 서울 유람을 한 덕에 복지관이 있는 동네가 내가 아는 곳이었다는 데에서 굉장히 큰 만족감을 느끼면서 면담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금요일은 끝이 나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딱히 활동적인 것은 하지 않았다. 방에서 자위를 하면서 보낸 멍청한 시간에 대해 후회를 하기도 하고, 뒤늦게 학교 비정규 강좌로 신청했던 <노션 활용법> 강의를 몰아보면서 3월 말에 <리더십개발> 수업시간에 만들어놨던 내 노션 페이지로 실습을 하기도 했다. 노션이 누군가에게는 배워서 할 정도의 일도 아님을 알게됐지만 그건 내가 모자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뛰어나기 때문이겠지. 수준 차이를 느꼈지만 괜찮았다. 부끄러움이 배우고 있다는 증거라니까.


월요일에는 오전부터 점심시간까지만 유치원에서 일을 하고 오후에는 기지개센터에서 하는 마음건강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1단계만 반복하는 관계는 이제 좀 지겨워서, 알던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계기가 됐으면 했는데 그러진 못했다. 그게 좀 아쉬웠고, 활동이 끝나고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든지 진관사를 구경한다든지 하는 서울 유람을 했다. 그 부분은 굉장히 좋았다. 종종 먼저 가시기도 하는 분이 "님들 하는 대로 할게요."라는 내용의 말을 한다는 건, 더 있다 가자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니 자기한테도 그럴 의향이 있다라는 표현인 걸 좀 나중에 깨달았다. 당연한 건데 내가 확실히 뭘 좀 잘 모르긴 하는 거 같다. 지하철에서 청년들과 헤어지고 혼자 개찰구를 향해 걸어갈 때는 '헤어지는 느낌이 생각보다 매번 다르네.' 하는 생각을 했는데, 내가 그걸 좀 신기해했던 것이 생각난다.


화요일은 유치원 근무를 6시까지 하고 짐을 싸서 둘째 누나 집으로 갔다. 누나가 4일짜리 통역 일정이 생겼는데 매형도 일이 있다 보니 육아 공백이 생겨 그동안 내가 조카 돌봄을 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았는데 누나가 계속 "고생 많았지, 고생했어." 해서 민망했다. 등원시키고 나면 오후 4시까지는 내 시간이고 4시에 하원해서 2시간 정도만 같이 놀면 매형이 저녁을 먹으러 집에 오기 때문이다. 매형은 총 1시간 정도 집에 머물렀다가 다시 나갈 때도 있지만 그러면 또 누나가 슬슬 퇴근을 하고 올 시간이 된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내가 조카를 보는 시간은 몇 시간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루는 공원을 가서 놀고, 하루는 놀이터를 가서 놀고, 하루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간다든지하면 시간은 굉장히 잘 간다. 집에서는 책을 읽어주거나 인형으로 역할놀이를 하거나 간식을 만들어서 먹여주다 보면 또 시간이 금방 간다. 기숙사에서는 불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 먹는 것에 대한 억압된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점도 좋다.


그동안 주말에 집을 찾아가면 누나가 나를 물심양면으로 잘 챙겨주려고 했었지만 공식적으로 일당을 받고 돌봄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액수가 하는 일에 비해 많은 것 같아 조카 등원시키고 좀 놀다가 집안일을 조금씩 했다. 집안일을 하면서 보니 누나나 매형이 좀 더 규모 있게, 체계 있게 집안을 관리하면 좋을 텐데 그게 잘 안되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안타까웠다. 그만큼 둘 다 바쁜 생활에 치이고 있다는 거겠지. 찌든 때가 있는 부분 청소라든지, 빨래나 베갯잇 세탁이라든지, 방 환기나 채광 관리, 청소, 쓰레기, 매트 관리 등 3일 동안 나눠서 조금씩 진행했다.


마지막 머무는 날인 토요일에는 첫째 누나, 셋째 누나(+조카 둘)도 모였다. 같이 식사를 하고 조카가 저들끼리 재밌게 놀 동안 누나 세명은 안방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전부 잠이 들었다. 막내 여동생이 빠진 어른 라인 세 자매가 저마다 피곤한 인생의 감시에서 잠깐 벗어나서 한 방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동생이지만 내 마음이 흐뭇했다.


큰누나가 아파트 앞 떡집에서 사 온 가래떡 세 줄을 한입 크기로 잘라서 기름에 약불로 천천히 바삭바삭하게 구웠다. 튀겨버리면 간단한 일을 굳이 일일이 굴려가며 동그란 가래떡의 둘레면을 모두 바삭거리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작업을 마쳤다. 왜냐면 그게 더 맛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칸짜리 소스접시를 찬장에서 운 좋게 찾아서 왼쪽은 참기름간장 소스를, 오른쪽은 꿀이 없어 올리고당을 담았다. 그다음은 세 조카를 식탁에 불러 모아놓고 간식을 올려놨다. 조카들이 집안에서 설치지 않고 얌전해질 방법이다. 그래야 누나들도 잘 쉴 것이고, 나도 조카들을 조용하게 만들고 차분하게 집 곳곳에 흩어진 내 물건들을 찾아 모아야 누락 없이 가방을 쌀 수 있다. 또 그냥 조카들 맛있는 것도 먹이고 싶고. 조카들이 맛있다며 더 해달라고 하거나 서로 더 먹으려고 싸울 조짐을 보일 때는 아주 흡족했다. "상품은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 더 맛있을 수밖에 없다고."라는 내용의 말을 조금 더 쉬운 말로 4학년 조카에게만 설명했다.


그리고 큰누나와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남영역까지 같이 갔다. 누나가 k패스를 가입하라 해서 지하철에서 그걸 했다. 이번엔 내가 누나 등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누나 어깨를 두어 번 주무르면서 격려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내 어깨를 주물럭거리고 잘 가라고 하고 갔다. 그랬다.


누나집에 있는 동안 24-2학기 수강신청도 했었다. 떨렸다. 수강신청은 떨리는 일이다.


희망했던 강의 6개 중에 4개는 듣게 되었으니 나쁘진 않고 나머지는 적당히 시간표 맞춰서 채워 넣었다. 이번에 못 들은 강의는 4학년이 되어서나 듣게 되겠지. 대학생들은 비대면강의를 선호한다는데 내가 무식하게 대면 강의만 집어넣었나 하는 걱정도 잠깐 했다. 내가 느끼기엔 비대면 강의는 확실히 공부 효율은 떨어지지만 일정관리에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누나 집 아파트 복도에서 찍은 낙조


가끔은 영어 말하기만 알려주는 게 아닌 스픽


유치원 방학이 끝나고 만나니 아이들이 반겨?주었다.


어른들의 성긴 나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농밀한 하루하루를 사는 아이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먼저 나를 잊을 테지만 그렇다고 서운해하지는 말자.


이번 글 커버 사진

내가 본 깡통에 든 쿠키 중에 가장 싸길래 사봤는데 맛있진 않았다. 조카 등원시키고 커피랑 쿠키 먹으면서 책 읽는데 거의 뭐 지상낙원이 아닌가 싶다. 한량의 삶. 책은 톨스토이의 <부활> 1권. 의도하고 고른 것은 아닌데 심리적 부활을 겪은 나로서 굉장히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누구든 공감시켜버리는 것이 클래식의 위력일 테고. 정말 대단하다. 책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의 문장에 육성으로 "지린다."라고 저속하게 감탄해버리고 마는 내가 너무 벌레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랜만의 캠퍼스 산책길 풍경. 가을은 이미 왔다는 것, 고양이들은 늘 비슷한 자리에 있다는 걸 생각했다. 마라도의 뿔쇠오리와 고양이에 대한 기사를 본 게 어제여서 고양이를 감상할 때는 굳이 필요하지 않을 착잡한 감정을 또 느꼈다. '고양이 편을 들고 싶은 사람은 고양이 편을 들고, 뿔쇠오리 편을 들고 싶은 사람은 뿔쇠오리 편을 들겠지.'


오늘의 액자 문.

두려워 피하고 있는 것에 내 기적이, 행복이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엇에든 용기 있게 나설 수 있겠지.

물이 두려운 사람은 물에 들어가서 물이 왜 생명의 상징인지와 물에 둥둥 떠가는 자유로움을 알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높은 곳이 두려운 사람은 올라가서 만물을 내려다보는 쾌감을 알게 될지 모르고,

사람이 두렵고 세상이 무서운 사람은 세상 속으로 나가서 사랑을 알게 될지 모르는 노릇이다.


아니면 절망편으로 뭐 두려운 것을 거슬렀다가 화를 입든가도 하겠지.


난 운 좋게도 아직까진 화를 입은 쪽은 아닌 거 같고, 기적을 찾은 쪽인 거 같다. 그리고 이제 슬슬 또 피하던 것으로 들어가 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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