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노트
꽤 최근까지 작가와 작품의 상관관계에 대한 여러 의견이 오갔다. 미술을 하며 좋은 점은 딱히 정답이라는 게 없다는 것인데, 그대로 뒤집어 말하자면 어디까지가 미술이냐는 문제와 제작자의 소명이 무엇인지 스스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녹록잖고 (많은 경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고충이 있다. 자신이 스스로 단순한 형태만 반복해서 표현해도 되고, 전통 안료로 그림 한 점에 몇 년을 쏟아붓는 경우가 있는 한편, 시작할 때 언급한 논쟁의 요점인 '작가가 직접 공정에 참여하지 않은' 작품에 대한 것으로 협업과 위임 역시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그래서 '손재주가 좋은 사람 = 시각예술가'라는 등식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분야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대중들에게도 상식으로는 통용되는 시대가 된 듯하다.
나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학급에 늘 찾아볼 수 있는 한두 명의 학생 중 하나였는데, 연습장에 끄적인 만화가 반친구들의 손을 타며 읽히고, 교실을 꾸밀 때 색을 칠하거나 종이 공예에 참여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데, 이런 캐릭터가 반에 평균 두 명씩이라고 할 때, (내 학생시절에) 전체 학교에는 열명에서 삼사십 명 정도의 미술적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미대에 진학을 하는 비율을 생각해 볼 때 그 '손재주'라는 것에도 정도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느 친구는 미술 선생님조차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소위 천부적인 경우가 있고, 내 경우에는 그 재주들의 틈에서 아등바등하는 수준이었기에 유년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비교적 일찍 깨진 편이었다.
작업을 하며 자주 노동집약적인 묘사에 특화된 작가들을 보곤 한다. 나도 청소년기부터 세부묘사를 꼼꼼히 하는 방식을 좋아했는데, 정작 크게 보아야 할 부피감이나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본질은 간과할 때가 많았다. 어쩌면 후자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내게는 어려웠기에 디테일에 집착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작업한 것들은 왠지 모르게 열심히했지만 묘하게 삐뚤빼뚤한 그림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멋쩍게 첫 미술학원에 발걸음 한 지도 20년이 지났다. 내가 계속 개인작업을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는 추호도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난달에 또 개인전을 치렀다. 커리어를 시작하던 애니메이션과 미디어아트 작업을 지나 지금은 입체와 캔버스작업까지 하고 있는데, 덕분에 해본 적 없던 톱질이나 콘크리트 드릴질도 해내고 있다. 여전히 내가 자른 나무는 미세하게 경사져있고, 내가 고정한 콘크리트벽 앵커는 스스로도 그 안정성이 미심쩍다. 항상 머릿속에 떠올린 반듯한 직각의 구조물과는 달리 내가 조립한 틀은 어딘가 엉성해서 수차례 다시 만들다가 마감에 쫓겨 그중 나은 것을 사용하는 타협을 보곤 한다.
내 부족한 손재주를 무마해 주는 것은 결국 '성의'이다. 모든 절차가 완벽해서 손볼곳이 없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내가 살아온 모습처럼 요철진 나무를 다듬고 조금씩 조이고 그리고 물감도 덮어주면 그런대로 봐줄 만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서 이제는 기대하지 않으려 한다. 완벽한 모습의 시작을. 되려 이번에도 대충 시작하고 매일 조금이라도 매만져주다 보면 서서히 작업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대략 완성이 된 조형물에 밀도감을 더해주고 마감을 꼼꼼히 지어주는 때이다. 어느덧 엉성했던 시작이 꽤 번듯한 모습으로 더는 손볼 곳이 없어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가장 처음 머릿속에 떠오르던 완벽한 자태와 엇비슷해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