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가기 전 노트
출산 후 산모에게는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증세가 빈번히 나타난다. 더불어 육아와 살림을 함께하는 배우자에게도 마찬가지의 성향이 발현되는데, 성실한 사람일수록 그 정도가 짙게 나타나는 것 같다.
속담정도로만 느껴졌던 '애 볼래? 밭맬래? 라 물으면 밭맨다.'는 말의 속사정을 여실히 체감한다. 변명같이 들릴 수밖에 없는 '눈 깜 박하는 순간 아이가 사고를 쳤다.'는 표현이 실제로 벌어지는 경우를 몇 차례 겪으면 아이를 돌보며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나아가 타인에게 그 역할을 맡겼을 때 언젠가는 찾아올 정서적 반작용을 생각하면 불경 구절 "부증불감 (不增不減)"의 뜻을 미약하게나마 받아들이게 된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를 돌볼 때 멀티태스킹의 죄를 짓는다. 칭얼대는 애를 업고 청소와 집정리를 한다. 몸을 비틀거리는 귀염둥이를 유아의자에 결속시키고 큰 아이의 공부를 돕는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이 좋은 전시가 찾아들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준비에 매달린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 아내가 첫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제발 전시 좀 없으면 좋겠다.'던 그녀의 속마음에 몸이 돌처럼 굳는 듯했다. 그래도 다시 아이엄마의 등을 몇 차례 쓸어주고 "금방 돌이 오겠다."는 절반의 거짓말을 하고 전시장으로 차를 몰아 내닫던 시절이 생생하다. 임기응변으로 말하던 "이번이 마지막이다."는 말은 이제 어떠한 뜻도 담지 않은 공허한 소리가 되었다. 진부한 변명일지라도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내 입장에서는 맘에 죄가 연기처럼 숨 막히게 피어오른다.
큰아들에게 '딜레마'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방향이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몇 가지 예시로 들어준다. 기차선로 갈림길에 목숨이 도박처럼 맡겨진 인부들의 이야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를 찾아 도피한 사람과 그를 찾는 강도의 이야기 등 어느 한쪽의 선택도 그다지 명쾌할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하며 이와 같은 이유로 삶과 세상은 단순한 선택으로 결정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아이가 바라보는 아빠의 처지임도 넌지시 알려준다. 내가 작업을 하고 전시를 치르는 것이 가족들의 시간과 루틴을 깨뜨리지만 이 일을 멈추면 나는 속도가 줄어드는 두 발 자전거처럼 쓰러지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절충으로 나는 높은 꿈과 그를 뒷받침할 작업량을 줄였고, 그만큼 가족 간의 유대와 전통적인 가장으로서의 부족한 부분에는 진심을 담아 양해를 구한다.
몇 년 전부터 누군가 내게 작업의 동기가 되는 감정에 대해 물으면 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미안함'이라 말한다. 하지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피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이 죄스럽지만 내게 드리워진 조건이라 믿게 되었다. 아내는 몇 차례 내게 "무당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기에 신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했는데, 매일 하루가 시작되면 반복되는 딜레마를 헤치며 나는 죄짓듯 작업을 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