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툼

작업실 노트

by 콩돌이 아빠
<납작해지기> 종이에 연필과 수채

내 마음도 세상도 조금씩 경계가 거칠어지는 기분이다. 어느 지점은 거칠다 못해 찌르거나 베이는 구간도 생기는데, 언뜻 몇 마디 사과로 넘어갈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 하나하나 시비를 가려야 하는 시절이 된 것 같아 유독 몸을 사리게 된다.


다급함에는 대부분 실수나 불운이 깃든다. 단 몇 초 일찍 도착하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일촉즉발의 사고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행인의 마스크 너머 육두문자를 듣게 된다. 가슴이 뜨거운 당시에는 나도 자동반사처럼 받은 만큼 갚아주려 하지만 며칠 후 생각이 가라앉은 즈음에 주변을 살피지 않고 서두르는 내 모습이 보인다.


대학원에서 몇 가지 과제가 겹친 일정을 소화하려 학교 이곳저곳을 활보하며 엉성한 마감을 치르던 때가 있었다. 가장 난감했던 사운드 작업을 위해 담당 선생님과 만나 급한 말투를 감추지 못하고 당장 원하는 바를 구현해 달라 독촉했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고는 "진정해."라는 말과 함께 천천히 마우스를 움직여 이곳저곳을 클릭했다. 느긋한 도사님의 축지법처럼 세션은 금세 정리가 되고 내가 기대한 스케줄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 서두를수록 움직임이 불필요해지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무의미한 시간에 다급해하던 내게 고요한 사찰에서 잠시 숨을 고른듯한 경험이었다.


<아래로 흐르기> 종이에 연필과 수채

며칠 전 가족들과 좋은 일을 함께 축하하려 단체 식사를 했다. 맘먹고 방문한 고가의 레스토랑에서 부모형제, 동기간의 우애를 다지고 로비로 나와 사진을 찍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들이 조카들과 뛰놀다가 나 정도 체격의 남자에 몸을 스치며 넘어졌다. 부딪혔나 싶을 정도의 마찰과 앞으로 풀썩하며 앉은 아들, 그리고 멋쩍게 웃으며 그 옆에 서있는 부친을 보며 시선을 돌리는데 남자는 눈에 광채를 내비치며 아버지께 "아이의 부모가 어딨냐"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한달음에 남자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들어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머리를 숙였다.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작업실에서 몇 시간에서 십 수 시간 혼자 이런저런 것들을 그리고 만든다. 원하는 바를 만들기에 충분치 않은 손재주를 핑계로 그간의 분노를 터뜨린다. 욕도 하고, 가격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물건은 던져도 보고, 부드러운 재료를 힘껏 구기기도 한다. 그런데 솟구친 먼지와 같은 심보는 가라앉지 않고 거친 호흡과 함께 작업과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그렇게 시간과 도구를 낭비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며 "침착해."라 말하던 느긋한 이탈리아 선생님을 생각한다.


단 몇 초 자전거를 세우면 안전히 내 길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잠깐 겁을 내고 화를 추슬러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불길이 순간 잡혔다. 천천히 움직이던 선생님의 마우스와 그 딸깍이던 소리의 박자를 기억하며 작업의 속도를 줄이자 계획보다 일찍 오늘의 할당량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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