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못 간 날의 노트
다음 작업을 만들고 있다. 한 달에 서너 개는 무조건 완성하고 싶었는데, 하나도 제대로 진전을 못 한채 시간이 흐르고 있다. 좋게 생각하면 올해 5월에 시작한 전시가 기적적으로 세팅된 것도 최근의 쉬어가는 구간과 작업의 딜레이를 만든 빌미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많은 미술작가들은 정말 열심히 작업한다. 비단 작품 제작 공정뿐 아니라 삶 자체도 치열하다. 수면시간이 조금 늘어난 것을 나태의 산실로 치부하고 본인을 몰아붙이는데, 그런 혹독한 자기 관리에서 나온 작품들은 누가 봐도 한국작가의 것임을 인증하듯 잘 그렸고 열심히 만든 티가 난다. 문득 모처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 컬렉션을 본 날, 불현듯 모두가 고군분투한 흔적이 남은 화폭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어떻게 내가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배짱 좋게 묘사가 적고 여백이 큰 이미지를 그려낼 꿈을 꾸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 투룸 아파트를 함께 쓰던 룸메이트 친구는 자기 관리에서 비롯된 스케줄에 쫓기는 나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유화작업을 하다가 느닷없이 아파트 중정의 수영장에 뛰어들곤 했다. 지구 최고의 날씨를 만끽한 친구는 큰 수건으로 몸을 두르고 돌아와 다시금 붓을 들고 매캐한 냄새의 물감을 화폭에 덕지덕지 발라나갔다. 룸메이트이자 대학원 동기였던 그는 내게 생활의 여유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삶에 대해 끊임없이 조언했지만 나는 그의 말이 귀찮았다. 그의 영어를 한 귀로 흘린 나는 서둘러 작업을 더 해서 학교생활에서 인정받고, 튼튼한 포트폴리오를 쌓아가기에 여념 없었다.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그리 서두르던 작업은 모래성처럼 유약했고, 나는 마뜩한 추억을 떠올릴 수 없는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다만 뇌리에 스치는 엘에이 부근의 노을과 내 중고차에서 흐르던 호텔캘리포니아의 간주 부분이 귓전에 울리는 몇분의 들뜬 기분을 곱씹는다. 찰나 같던 풍경, 짧게 주고받던 몇 마디의 대화, 그리고 마스터피스를 향한 끝없는 갈구는 순간과 영원을 휘저어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남긴다.
다시금 맘을 추스르고 작업에 들어간다. 이번 작업은 밤 호수에 내린 약한 소나기이다. 빗물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뭇잎만이 어둠 속에 쏟아진 비를 기억할 것이다. 그 후에는 개미들만 잠시 본 풀밭의 무지개이다. 아무도 보지 못해 기억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나만은 붙들어주자. 열심히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자. 대충 알아들은척 하는 어른에게 갈길을 채근당하는 아이의 맘을 헤아려보자.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가장 작은 구멍을 통해 큰 세상이 펼쳐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