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노트
속도나 숫자는 경험할수록 무뎌진다. 자전거로 20킬로를 내달릴 때 '지금 바퀴에 돌이끼면 땅에 굴러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오토바이나 차의 속도를 서서히 올려 130킬로까지 밟으면 갑자기 세상이 멈춘 느낌이 드는 역설이 발생한다.
금액도 그런 것 같다.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 기본 물품을 사느냐 삼천 원짜리 고급형을 사느냐'를 두고 굉장한 고민 끝에 다음에 사기로 하고 문을 나설 때가 있는데, 미술품에 책정된 몇백, 몇천, 몇억의 가격표를 보면 다시금 무덤덤해진다. 심지어 줄이은 0들을 보며 '더 비싸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상황에 따른 사람의 감각이 범사를 낯설게도 하고 기적을 당연시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위에 언급된 금액은 누군가의 연봉이고 생명이 오가는 금액이기도 하다. 작업을 하면서 그 단위를 설득하는 방법으로 투여된 노동, 성의, 시간을 직관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내 나름의 양식이 자리 잡았다. 더불어 '겹쳐진 숫자 0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만큼 노력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은 두꺼워진 손가락, 굳은살, 그리고 중노동을 한 것 같은 삭신의 통증으로 대신한다.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인류 종의 학명이다. 전시장에 진열된 작업을 본 이들이 나를 여성으로 오인하기에 Mr.라는 말을 더해 Mr. Habilis라는 닉네임을 떠올려본다. 커리어 초기에는 최첨단 기기를 사용하는데 심혈을 쏟았으나, 문득 내 손에 들려있는 바늘, 실, 풀 같은 석기시대부터 사용하던 재료들을 바라본다. 잠시 작업의 바운더리를 넓히려 한 프로젝트가 나를 선사시대 너머까지 떠민 것 같아 헛웃음이 날 때가 있다. 나는 바늘 땀 같은 땀을 이마에 맺고 하루 종일 예민한 손 끝으로 매듭을 짓는다.
이제는 시간과 촉감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작업실을 나서면 세상은 늘 어둡고, 손끝은 항상 얼얼하다. 손가락 근육의 피로가 누적되면 물그릇을 들다가 떨어뜨리는 일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이 작업을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까?'라는 우울감이 발끝부터 번져나간다.
미스터 하빌리스는 곰살스레 캔버스를 기우는 일로, 실을 꼬고 묶어나가는 일로 감각과 시간 너머의 영원한 세계로 진입한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가 생각이 멎는 한 순간, 나는 시간도 몸도 없는 세상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