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 나

작업실 노트

by 콩돌이 아빠

생각해 보면 지금 하는 미술작업 외에 딱히 '직업'이라 불릴만한 일을 한 적이 있나 싶다. 가장 빈번히 했던 겸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직이었는데, 이마저도 급한 전시가 있거나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때마다 하던 임무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만두곤 했다. 아직도 나를 좋아해 주던 학생들이 내가 떠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거나 울먹일 때의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슴에 남아 저릿거린다.


그리고 단발성으로 했던 식당 일, 택배와 사진촬영을 함께하던 잡화점 아르바이트, 그리고 벽화나 삽화 작업이 떠오른다. 하나 더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 사업장에서 간단한 용역을 맡던 것인데, 덕분에 '세상에 있는 온갖 무거운 것들'과 '내가 알지 못한 세상의 깊숙한 곳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숨 구멍> 종이에 수채와 색연필

여타 배우나 예체능계에서 무용담으로 전해들은 부업의 경험에 비해 내 이력을 뽐내자니 입 한번 떼어볼 수 없을 만큼 미미하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끔찍한) 요소들이 있다. 식당 일을 할 때는 대부분 반말을 들었다.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이어서 그리 속상하지는 않았어도 정중히 존대해 주던 분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나도 저런 품위를 갖고싶다.'는 다짐을 하는 동시에 어떤 분은 화장실에서 내가 손을 씻는지 감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해할만한 상황이지만 아직도 그 미심쩍은 표정과 하대의 어투가 선명하다. 더불어 식사 후에 남아있는 갖가지 휴지 뭉치들은 유독 맨손으로 움켜쥐기 꺼려졌다.


군복무 시절, 무서운 외모와는 다르게 무척 섬세한 간부님과 오래간 한 소대에서 지냈다. 내 군생활은 일반병들과는 약간 달리 교육기관에 배치되어 보내던 터라 2년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잠시라도 정신을 놓고 있을 때 들리던 -뒷머리를 쪼개는 듯한- 불호령은 아직도 꿈에 나올 것 같다. 그런데 그리 무섭고 깐깐하던 그분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 식당에서의 모습이었다. 간부님은 식사를 마친 후 스무댓 개 정도의 접시들을 크기 별로 모으고 쌓은 뒤 식탁에 너저분히 튄 양념과 밥풀 따위의 흔적을 없앴다. 제대 후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던 때에도 그렇게 뒤처리를 하고 떠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기에 당시에도 후에도 인상이 깊었다.


그때의 간부님만큼은 아니지만 되도록 외식 후에는 자리를 정리한다. 그리고 가능한 식사를 하며 사용했던 냅킨은 한주먹에 모아 내 손으로 휴지통에 버리고 나온다. 그렇게 나는 우연히 마주친 어느 누군가에게서 그 언젠가의 나를 본다. 좋았던 모습을 답습하면 좋겠지만 최소한 악행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옛 기억을 소중히 한다.

<싹> 종이에 연필과 수채

오늘은 5월의 개인전 종료 후 작품이 반출되는 날이었다. 과하게 걱정을 해서 작업을 너무 많이 해갔다. 준비해 간 것들의 3분지 1 정도는 보여주지 못한 채 그대로 공방으로 돌아왔는데 몇 시간을 운전해 온 업체 분이 노크를 했고 나는 문을 열어 인사했다. 대부분의 평면작업을 하는 회화작가들의 캔버스는 규격이 일정해서 상대적으로 크기가 다양하고 무게도 있는 내 작업을 옮길 때 더 큰 노고가 생긴다. 보통 운송업체 분들은 표정도 말도 없고, 간혹 짜증이나 기세를 드러내는 분들도 있는데, 아무리 무골호인인 나일지라도 매너의 공백이 반복되면 동물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내고 싶다. 오늘같이 운 좋게 다정한 인격자와 만나게 된 날에는 신이 주신 우연과 인연에 감사드리고프다.


나는 나를 본다. 나의 무례는 언젠가 내 무릎까지 움퍽 빠지는 함정으로 나에게 똑같이 나타난다. 나의 신중한 말과 행동은 조금 시간이 소요되어도 그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누군가에게서 그간의 인내를 보상받는다. 그리고 언젠가 체력이 부족해져 내 사소한 호의에 가졌던 회의감이 잠시나마 해소되는데, 가슴의 호연지기가 알팍해져 언제까지 갈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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