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노트
그립고 보고픈 사람이 남긴 말이 메아리친다. "입에는 밥이 적고 마음에는 일이 적어야 한다."는 짧은 구절인데, 내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습지에 자라나는 버섯처럼 금세 한가득이 되어 앞의 말과 뜻을 반대로 행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 실제로 사소한 살림이나 입밖에 낸 약속이 순식간에 쌓여 오르는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틈을 주지 않는 세상사에 서운함을 느낀다.
전시가 목전일 때는 더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고 미술관에 놀러 가 심드렁할 때는 몰랐던 영역에 몸을 풍덩 담그자 그 안에 얼마나 복잡한 메커니즘과 절차가 이뤄지는지를 몸소 체험하길 수년째이다. 관계자와 주고받는 전화와 이메일, 작품 촬영과 정보 준비, 운송과 포장 등 사소하지만 중요한 잔업에 치여 몹시 분주하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내를 독촉하며 팀처럼 움직였는데, 닭똥처럼 떨어져 내리던 그녀의 꿈과 혼을 쏙 빼놓는 육아에 질겁하며 나 혼자 대부분의 일을 치른다. 특히 그림 마감, 포장, 캡션(텍스트 정보)과 촬영을 준비하는 막바지에는 하루가 10분처럼 짧게 느껴진다.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이 한정된 나는 군시절 추억이 지워지지 않고 아직도 한아름이어서 얘기가 무한반복된다. 가장 업무가 많던 일병시기에 취침나팔이 울려 퍼지던 밤 10시까지 땀에 절은 군복과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조인 전투화를 벗지 못하고 담당 임무와 씨름했다. 아픈 부대원 돌보기, 다음 날 일정 준비, 당일 일지 작성, 훈련 교보재 정리 등을 모두 떠안고 실제 울면서 하나씩 해치우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두서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내게 한참 위 선임은 무심히 다가와 한마디를 건넸다. "닥치는 대로 하지 말고, 일단 앉아. 그리고 딱 10초만 쉬고 종이를 꺼내서 할 일을 모두 적어. 그리고 그 옆에 빨리 끝낼 수 있는 순서대로 차례를 적고 불필요하거나 다음 날로 넘길 일을 분리해. 그리고 하나씩 해치우면서 지워나가. 알겠어?" 그 짧은 20년 전의 대화는 아직도 나에게 작은 메모지나 종이를 건네주어 일을 적고 순서를 잡아가게끔 한다.
항상 느끼지만 지금 집착하는 그림의 일부로는 전시를 치를 수 없다. 가끔, 나아가 자주 전시장에 가볍게 발을 들이는 사람의 입장으로 전체를 구성할 작품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당장 붙잡고 있는 세부사항들에서 화악 몸을 벌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뒷걸음치기를 반복한다. 할 일을 적고 지워나가다가 다시 적고 그리고 다음날 다시 살펴본다. 이 과정 속에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 가능한지 헤아려진다. 그래서인지 단 몇 주 만에도 전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한편, 몇 년이 지나도 작품 하나를 끝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적기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이는 상황에 진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