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시인 정현종의 시 '섬'이다.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욕망을 표출한 시다. 맨 처음 경남 통영 비진도를 사진으로 봤을 때 뜬금없이 이 시가 떠올랐다.
안경의 가운데 테처럼 좁은 해변을 따라 섬이 연결된 비진도를 보며 이렇게 패러디하고 싶었다. ‘섬 사이에 길이 있다. 그 길을 걷고 싶다’
통영 앞바다엔 유인도와 무인도 등 무려 570여 개가 떠있다. ‘천사(1004)의 섬으로 불리는 전남 신안군보다는 적지만 프로축구로 말하면 ‘프리미어 리그’ 급 섬들이 즐비하다.
욕지도, 한산도, 연화도, 매물도, 사량도, 미륵도, 비진도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내로라하는 섬들이 특유의 풍광을 내세워 탐방객들을 유혹한다. 이중에서도 지난 주말 마이힐링로드가 찾아간 비진도는 한려수도 ‘톱 3’에 꼽히는 보석처럼 작고 매혹적인 섬이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 설레는 비진도는 별명도 많다. ‘안섬’과 ‘바깥섬’이라 부르는 두 개의 섬이 가는‘육계사주’로 연결돼 ‘모래시계섬’이라고도 하고 하늘에서 보면 봉긋하게 솟아오른 여인의 양쪽 가슴을 닮았다고 해서 ‘미인도’라고도 한다.
비진도는 4시간이면 섬 전체를 돌아볼 만큼 작지만, 양쪽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봉우리는 비진도의 풍경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채색한다.
여기에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해변 양쪽으로 한쪽엔 몽돌해변이, 다른 면엔 백사장이 펼쳐져 서로 다른 바다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비진도가 아니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광이다.
마힐로는 오전 11시40분 비진도에 도착해 섬의 유일한 횟집에서 회덮밥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천정부지로 오른 물가 때문에 음식값도 덩달아 올랐지만 가성비로 볼 때 이 집 밥값은 통영보다 월등히 비쌌다. 통영에서 도시락을 주문할 수도 있지만 쓰레기 처리 문제가 남는다. 단체로 온 섬 트레킹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후 12시40분 길을 나섰다. 바깥섬에 우뚝 선 해발 312m의 선유봉이 목표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바다백리길중 아름답기로 소문난 3코스 산호길이다. 이 길은 국립공원 탐방분소가 들머리로 선유봉 허리를 나선형으로 돌면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코스다.
잔뜩 흐린 날이 될 것이라는 기상대 예보는 틀렸다. 기온도 예보와 큰 차이를 보였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햇볕은 짱짱했고 기온은 섭씨 20도를 넘었다. 이 정도면 초여름 날씨다.
봄기운이 완연해 출발부터 마음이 설렜다. 산호길 정방향은 너무 가파르다는 정보를 듣고 역방향 코스로 잡았다.
아마도 보름만 빨리 왔으면 붉게 타오르는 동백꽃 터널 속에 갇혔을 것이다. 그늘 좋은 숲길엔 온통 동백나무가 울창했다. 춘분이 지나 동백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거친 해풍을 이겨내느라 동백나무가 요란하게 휘어진 숲은 '팀 버튼' 감독의 영화처럼 동화와 현실 사이를 거니는 듯한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조붓한 길 좌측 언덕에 비진암이 북쪽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수행하다 지쳤을까. 스님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퇴락한 암자지붕엔 동백꽃이 수북이 쌓였다.비진암을 지나 섬 모퉁이를 돌아서면 남쪽 바다를 향해 솟은 절벽이 등장한다.
태풍이 불 때 파도가 덮치면 바위 위 소나무에 그 비싼 갈치가 걸렸다는 ‘갈치바위’다. 그 바위에서 좌측 절벽을 바라보면 대만 8경 중 하나인 화련의 ‘청수단애’를 연상시키는 기막힌 풍광에 눈을 뗄 수 없다.
갈치바위부터는 바다를 끼고 줄곧 오르막길이다. 이 길에서 잠시 땀을 식힐 수 있는 곳이 노루강정전망대다. 강정은 해안의 바위벼랑을 일컫는데 아주 오래전 섬사람들이 노루를 쫓아 벼랑아래로 떨어뜨려 잡은 곳이라 해서 이름이 유래됐다. 대체 이 작은 섬에 노루가 몇 마리나 쫓겨 다녔을까.
이곳에서 선유봉전망대로 올라가는 길도 경사도가 만만치 않지만 진달래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따뜻한 날씨 탓인지 해맑게 핀 진달래가 화사하게 손짓하는 것이 우리 일행을 향해 힘내라고 응원하는 듯했다. 선유봉 전망대부터는 하산길이다.
선유봉 팔각정 전망대에서 잠시 한 숨을 돌린 뒤 내려와 흔들바위를 지나면 누구든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미인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사로잡을 만큼 선유봉의 핫스폿이다.
MZ세대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비진도 사진의 대부분은 바로 이곳에서 찍은 거다. 전망대에 서면 비진도 해변과 안섬 그리고 그 너머 미륵도, 한산도, 용초도, 추봉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뷰 맛집’이다. 나도 회원들과 함께 그곳에서 한참 동안 ‘뷰멍’을 때리다가 내려왔다.
원점회귀까지 걸린 시간은 쉬엄쉬엄 걸어서 3시간 20분이었다. 통영으로 나가는 여객선 시간(5시 15분)까지 1시간이 남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초록색 해초류가 뒤덮은 몽돌해변을 산책하며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이 귀한 시간에 선착장에 서서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어느 섬이든 섬을 온전히 보고 싶으면 그 섬의 산에 올라야 한다. 비진도를 찾는 사람들은 주봉인 선유봉을 올라야 진짜 비진도를 다녀온 것이다. 15시간 40분의 긴 여정을 거쳐 먼 길을 다녀왔지만 잠들기 전까지 잔상(殘像)처럼 비진도의 값진 풍경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