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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Mar 11. 2024

'산수유는 꽃이 아닌 나무가 꾸는 꿈'

전남 구례 지리산둘레길 밤재~현천마을 산수유길

지리산둘레길은 개인적으로 ‘애정(愛情)’하는 길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산, 지리산이 품고 있는 숫한 계곡과 봉우리엔 설화와 전설이 살아있고 순정하고 압도적인 풍광은 마음속에 깊은 여운(餘韻)을 남긴다. 


수려한 골짜기마다 민족의 애환과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담긴 스토리가 애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인문학적인 고찰과 아름다운 산수가 교차하는 지리산은 갈 때마다 늘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이번에 내 마음을 흔든 것은 ‘꽃’이다. 그것도 봄의 전령사인 ‘산수유’다. 지리산둘레길 21코스(전북 남원 주천~전남 구례 산동)는 산수유의 본고장이다. 1000년전 중국에서 구례 산골로 시집온 새색시가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가져온 산수유 시목(始木)이 아직도 건재한 길이다. 

 

(구례 산동면 현천마을 입구의 커다란 산수유나무 앞을 지나고 있는 '마이힐링로드' 회원)


마힐로는 21코스의 절반을 뚝 잘라 걸었다. 밤재~편백나무숲길~계척마을 ~현천마을로 이어지는 코스로 대략 9km다. 꽃샘추위는 잦아들고 하늘은 구름은커녕 티 한 점 없이 눈부신 날이다.


기상예보는 꽃샘추위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 나무가 울창한 숲 속에서도 찬바람엔 봄내음이 가득했다.  더구나 이곳은 겨울에도 햇살이 따뜻한 지리산 남쪽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가 아닌가. 

 

이 길에서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경쾌한 물소리다. 일행 중 한 명이 "봄이 오는 소리"라고 했다. 밤재에서 편백숲으로 가는 오솔길로 접어들면 개울과 동행하게 된다. 경칩이 지났으니 그늘진 개울에서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아 숲 속의 정적을 깨트리며 흐른다.


(범재를 지나 편백나무숲길을 걷고 있는 마이힐링로드 회원들)


이 길에서 의외의 수확은 청량한 편백나무숲길이다. 편백숲을 지나가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걸어보니 '세로토닌'이 체내에 형성된 것처럼 기분을 업 시켰다.  편백숲은 일 년 내내 잎이 떨어지지 않는 상록수로 사계절 늘 푸르름을 선사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겐 '치유의 숲'으로 통한다.


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면역력을 높여주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물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라지만 편백숲 특유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이 길에선 수령 50년은 넘은 듯한 수만 그루의 편백나무가 비탈길에 빽빽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어둡고 조붓한 오솔길에 원초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편백 특유의 기운 때문인지 그 길을 걸을 땐 일상의 잡념과 어수선한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래서 숲길이 오르막 내리막이 심해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온통 산수유로 둘러싸인 현천마을 앞 저수지)


하지만 적어도 3월엔 이 코스의 ‘주인공’은 ‘산수유’다. 이때가 절정이기 때문이다. 꽃잎의 길이가 2mm에 불과한 산수유의 꽃송이는 그저 수수하지만 수천 그루가 한꺼번에 노란 꽃무리를 지으면 화사함 그 자체다.


계척마을로 접어들면 길가에 지천인 산수유가 티끌하나 보이지 않는 쾌청한 날씨에도 조명등처럼 길을 밝힌다. 절정이 되면 꽃받침에서 왕관처럼 튀어나온 꽃봉오리가 활짝 벌어지고 5~6개 수술까지 모두 아우성을 치며 꽃멀미를 일으킬 것이다.


계척마을 이순신광장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시끌벅쩍했다. 때마침 이곳에 심어진 산수유 시목 앞에서 의관을 정제한 산수유축제 관계자들이 '풍년기원제'를 열고 있었다. 천년의 연륜을 나이테에 새긴 시목은 여전히 위풍당당한 채 꽃을 피웠다. 


(현천마을이 배경인 MBN 예능다큐 '자연스럽게'에 나오는 전인화의 집)


구례뿐 아니라 전국의 산수유는 '할머니 나무'라고 불리는 시목의 개체에서 퍼졌다니 그 옛날 '산동성 처자'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덕분에 풍년기원제 제례상에 올린 팥이 풍성하게 박힌 '시루떡'도 얻어먹었다.


계척마을에서 현천마을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길이다. 아마도 한 여름엔 걷기 힘든 것은 물론 현천마을 입구를 찾지 못해 산동면소재지로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계척에서 현천은 논과 야산이 이어졌으니 길이 마땅치 않다면 다소 돌아가더라도 숲길과 농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이정표를 해놨으면 어떨까 싶다.  

  

이날 트레킹의 날머리인 현천마을은 온통 산수유에 점령당했다. 마을에 산수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유 군락 속에 마을이 파묻혀 있는 듯했다. 3월이면 전국의 탐방객들을 유혹하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옹기종기 어우러진 초가집과 기와집,  그리고 한적한 돌담길과 마을 앞 저수지를 노랗게 휘감은 산수유의 아름다운 정취에 외지인들은 매혹되지만 마을사람들에겐 시월중순 이후 열매를 수확하면 알토란 같은 소득원이 될 것이다. 


(현천마을 돌담에 활짝 핀 개나리 닮은 '영춘화'


붉은색 '루비'처럼 생긴 산수유 열매는 주로 한약재로 쓰인다. 모건강식품 대표가 TV에 직접 등장해 "남자에게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며 웃겼던 그 제품의 이름에도 산수유가 들어간다.  


소박하고 정겨운 골목길 돌담 위엔 산수유뿐만 아니라 개나리처럼 어여쁜 ‘영춘화’와 '홍매화'도 농밀한 매력을 뿜어내며 탐방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날 산수유축제가 개막한 산동면소재지는 인파와 차량으로 뒤덮였지만 현천마을은 의외로 탐방객이 적었다. 아마도 산동면 여러 마을로 분산됐기 때문일 터다.  마음 같아선  '반곡마을'과 '상위마을'에도 들러 ‘산수유’에 더 취해보고 싶었지만 인파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작가 김훈은 ‘자전거여행’에서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고 했다. 3월을 상징하는 꽃으로 화려한 매화와는 또 다른 산수유의 이미지다. 산수유길을 걸으면 누구나 작가의 시 (詩)적인 표현에 공감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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