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겨울바다에서 나를 씻어낸다
충남 보령~홍성 서해랑길 63코스 트레킹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겨울바다를 갔다. 찬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럽고 적막한 해변과 고요한 파도, 비릿하지만 신선한 공기는 송년에 가슴속 해묵은 앙금과 실타래처럼 엉킨 번잡스러운 상념을 털어내기에 딱 좋다.
올해의 선택지는 천수만을 걷는 충남 홍성 서해랑길 63코스다. 보령 천북굴단지에서 홍성 궁리항까지 11.2km로 차분하게 걷기에 적당하다. 아침나절 천북굴단지는 활기가 흘러넘쳤다. 굴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가설 천막이 줄지어 서있다. 친구가 품바여왕 '버드리'가 공연한다는 현수막을 보고 반색했다.
천북굴단지 바다 건너편엔 안면도가 길게 뻗어있다. 철새 도래지인 ‘천수만’은 과거 갯벌이었던 곳에 간척 사업이 진행되면서 4700만 평에 달하는 넓은 간척지와 담수호가 생겨난 곳이다. 안면도가 길쭉하게 틀어막아 거대한 내륙 해의 형상을 띤 천수만은 얕을 천(淺), 물 수(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얕은 바다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바람에 경직된 몸을 풀고 홍성 방조제로 향했다. 방조제를 건너면 남당리로 이어진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바람은 거칠었다. 이 코스는 자연친화적인 길이 없다. 바다에 접한 산길을 타고 오르내리거나 거친 바위를 넘어 모래사장도 걷는 태안 해변길과 달리 오로지 대로변 자전거 전용도로와 인도를 걸었다.
어찌 보면 전남 해남 땅끝탑에서 인천 강화까지 1800km에 달하는 서해랑길을 연결하다 보니 인위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 장점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인 드넓은 갯벌과 바다를 보며 친구처럼 동행하듯 걸었다.
역시 겨울바다는 산뜻하고 조용하며 선명하다. 그래서 사색적이다. 겨울바다를 가만히 바라보면 처절하게 아름답다. 바닷물이 더 맑고 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이 “ 에메랄드빛 물감을 풀어놓은듯 하다”며 감탄했다.
느낌이 아니라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겨울철에는 태양빛이 수평에 가깝게 들어오고 하늘에 구름이 끼거나 태양 각도가 낮아 빛의 강도가 줄어들면서 청록색이 더 강하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수룡항 포구를 거쳐 남당항 입구로 들어서니 예전의 낡고 너절한 포구는 자취를 감추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해양분수공원이 널찍하게 자리 잡았다. 7년 만에 찾은 남당항은 놀라울 만큼 변신했다.
내륙 사람들에게 “남당항을 간다”는 말은 “해산물을 먹으러 간다”는 말과 동의어다. 남당항은 대하, 새조개, 우럭, 꽃게의 집산지로 횟집거리가 제법 번화하다. 특히 겨울철엔 천수만의 별미인 싱싱한 대하와 새조개를 맛보기 위해 도시의 미식가들이 줄을 잇는다.
갈 길이 먼 우리 일행은 횟집거리를 외면하고 방파제를 통해 노을전망대로 향했다. 길이 102m인 붉은색 노을전망대는 육지에서 시작해 다리처럼 바다 위로 연결돼 있다. 전망대의 끝에는 “나 지금 홍성, 죽도록 사랑해”라는 문구를 담은 조형물을 설치해놨다. 생뚱맞긴 하지만 모든 탐방객들이 조형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니 홍보효과는 만점일 테다.
어사항으로 가는 길엔 바람의 강도가 더 세졌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보니 바람을 안고 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겨울바다에 시린 바람이 없다면 걷는 맛이 덜하다. 죽비로 내려치듯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바람은 천수만의 평화로운 바다 풍경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사항에서 바다로 돌출된 궁리항쪽을 바라보니 우리의 목적지인 속동해안공원의 하얀색 홍성스카이타워가 보인다. 지난 5월에 오픈한 스카이타워는 65m 높이다 보니 멀리서도 가까워 보이지만 어사항에서도 3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바람은 잦아졌지만 대신 눈이 내릴 채비를 하는 듯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왔다.
만조 때가 되자 속동해안공원의 넓은 백사장은 밀물이 들어오면서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백사장을 걷던 탐방객들이 뒷걸음치며 뒤돌아섰다.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다.
탐방객들은 스카이타워로 몰려들었다.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설치돼 아찔한 스릴을 느낄 수 있는 홍성스카이워크에 서면 광활한 서해 갯벌과 천수만의 리아스식 해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 세밀한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시인 양성우는 “겨울바다를 가는 것은 / 바로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시린 바닷바람 가슴 가득히 마셔 / 나를 씻어내고 싶어 가는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송년의 겨울바다를 찾아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