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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습지와 붉은빛 철쭉의 성(城)

전북 고창 운곡습지와 고창읍성 도보여행

by 박상준

고인돌의 고장, 전북 고창의 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 '내륙의 곶자왈'로 불리는 람사르 운곡습지와 고창 사람들이 ‘모양성’으로 부르는 ‘고창읍성’이 그랬다.



운곡습지의 호수길은 온통 초록빛이 가득하고 읍성 성벽은 붉게 타오르는 철쭉에 둘러싸였다. 운곡습지는 적막하고 고즈넉하며 읍성은 축제장을 방불케 할 만큼 떠들썩했다. 운곡습지엔 새들이 지저귀며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지만 고창읍성엔 버스킹 하는 판소리꾼들의 절창이 울려 퍼졌다.

주말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제목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차분함과 뜨거움’, ‘초록과 빨강’, '새소리'와 '판소리' 등 엇갈린 풍경을 간직한 두 곳의 길을 걸었다.


#람사르운곡습지


7년 전 운곡습지 트레킹 때는 습지 본연의 풍광이 생생히 살아있는 생태길을 걸었으나 이번엔 운곡호수 둘레길 9km를 돌았다. 미세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쾌청한 봄날이다.


아침에 도착한 운곡습지탐방안내소는 너무 조용해서 잘못 찾아왔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직원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연둣빛 생강나무 묘목장 옆길로 출발했다.



운곡생태 2코스는 인공호수를 끼고도는 길이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부터 다르다. 다만 차도와 함께 이용하는 걷기 길은 콘크리트로 포장돼 걷는 맛은 떨어졌다. 호수를 바라보며 2.5km를 걸어 운곡서원이 한편에 자리 잡은 운곡습지 생태공원에 도착했다.


생태공원은 제법 많은 예산을 들인 듯 넓고 말끔하게 단장됐으나 내 눈엔 허름한 운곡서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서 깊은 서원은 방치됐다. 본래 선산 김 씨 사우로 중국 주희와 유학자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신 서원은 쇠락한 모습이 역력했다.


별채 대청 한곁엔 생활폐기물이 쌓여있다.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신안구가’라는 편액만 벽에 비스듬히 매달려있다. 따스한 봄날이지만 서원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고창군의 무관심이 안타까웠다.



생태공원에서 생태습지 쪽으로 걷다 보면 생태둠벙 삼거리가 나온다. 생태둠벙 주변엔 유채꽃이 만발했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습지를 거쳐 고인돌박물관이 나오고 우회전하면 호수를 끼고 용계마을까지 조붓하지만 적당히 가파른 숲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옛길을 그대로 살린 원시적인 숲길이다. 30여년전 운곡습지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호수를 따라 걷게 되는데 투명한 호수에 반영된 생명력 가득한 자연과 길의 끝자락 현호색 군락은 걷는 내내 시선을 붙잡는다.


운곡생태길 2코스의 광활하게 펼쳐진 인공 호수와 티 없이 맑은 푸른 하늘, 초록의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묘한 마력이 있다.


#고창읍성


고창읍에서 점심 식사로 ‘바지락 돌솥밥’을 맛있게 먹고 찾아간 고창읍성은 전혀 대조적인 풍경이다.



성 둘레 1,684m의 고창읍성은 성내 수백 년 묵은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조화를 이룬 운치 있는 산책길로 유명하다. 하지만 4월 하순부터는 생기발랄한 철쭉이 조선 단종 때인 1453년에 건립된 성곽을 아름답게 채색한다.


황당한 것은 고창군의 입장권 판매전략이다. 매표소 앞에서 길게 늘어선 탐방객들 사이에 한참을 기다려 40명분의 티켓을 두당 3000원에 12만원어치를 구매했다. 그런데 막상 읍성 출입구로 들어가니 관리인은 없고 아무나 출입이 가능했다. 티켓 창구에서 입장권이 아닌 ‘고창 사랑상품권’을 판매한 것이다.


뭔가 속은 듯한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성벽 위로 올라섰다. 고창읍성은 충남 예산 해미읍성과 전남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성이다. 매년 이 맘 때는 불타는듯한 철쭉도 근사하지만 성내 소나무숲길과 대나무숲도 일품이다.



성벽 위에서 소리 없이 열정을 내뿜는 철쭉 군락을 내려다보며 읍성을 한 바퀴 돈 뒤 소나무 숲길을 거쳐 몸통이 굵직한 대나무숲에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주윤발과 장쯔이가 대나무 위를 오가며 춤을 주듯 무술 대결을 벌이는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이 연상될 만큼 하늘 높이 솟은 수천 그루의 대나무에 압도된다.


고창읍성 산책은 눈만 호강하는 것이 아니다. '판소리의 본향'답게 읍성 주변에선 소리꾼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다. 그 애절한 절창이 읍성 구석구석까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그래서 읍성 산책길은 시청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황홀한 색채의 향연은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온통 초록색 숲과 습지, 붉은색 철쭉의 성(城), 그리고 푸른 창공은 고창에서 만난 자연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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