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호수 ‘물빛길’ 팔색조 풍경에 반하다
전북 군산 구불길 5코스 트레킹
올 5월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럽다. 어느 땐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가 하면 하루가 지나면 초가을처럼 서늘하다. 지난 주말 5년 만에 군산 구불길 5코스를 가는 날이 그랬다. 하늘은 잔뜩 흐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하늘이 티 없이 쾌청하고 후덥지근한 것보다는 비만 쏟아지지 않는다면 이런 날이 걷는 데는 더없이 좋다. 대숲에선 서걱서걱 소리가 나고 새소리도 선명하게 들린다.
군산호수를 품고 있는 청암산 주차장은 구불길 5코스의 들머리다. 코스도를 보니 길은 그대로인데 길 이름이 ‘구슬뫼길’에서 ‘물빛길’로 바뀌었다. 요즘은 사람 이름도 쉽게 개명하는 세상이니 길 이름이 달라졌다고 탓할 수는 없지만 왠지 길의 정체성이 사라진듯해 아쉬움이 들었다.
‘구슬뫼(玉山)’는 한적한 호수를 둘러싼 나지막한 작은 산에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하나로 연결돼 붙여진 이름이다. 산세와 조화를 이룬 호수는 마치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독항아리를 닮았다.
물빛길은 1963년 이후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입산금지 했다가 2008년에 개방됐다. 그래서 자연생태가 나름 잘 보존됐고 13lm의 거리(풀코스는 18.4km)가 짧다고 느껴질 만큼 풍광이 다채롭다.
물빛길을 한 바퀴 돌으려면 두 가지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청암산으로 이어진 산길로 가던가 수변산책길을 이용하는 것. 아니면 중간에 청암산 정상(이라야 해발 115m)에 올라가도 좋다. 산 정상에선 군산시내와 남쪽 만경강, 서해 고군산도의 멋진 뷰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수변산책길을 택했다. 물길을 따라 걷는 것이 훨씬 멀지만 물빛길을 제대로 맛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역코스로 시작해서 숲 속으로 방향을 틀자 순간 마치 터널 속으로 들어선 것처럼 그늘이 짙었다. 한 여름에도 쾌적한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길은 대숲과 습지가 시그니처 풍경이다. 대나무가 지천이다. 물가에 드리워진 커튼처럼 도열해 있거나 길가에 병풍처럼 밀집돼 있다.
대숲 사이에서 미소 짓는 물여울처럼 불어오는 살랑살랑 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물빛길 중간중간에 왕버드나무 군락, 습지, 연꽃밭, 조릿대숲이 파노라마처럼 등장했다 사라진다.
걷는 내내 녹색분말을 뿌린 것처럼 연초록 짙은 숲에선 산새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길을 안내한다. 오솔길 바닥엔 때쭉나무 하얀 꽃잎이 카펫처럼 흩뿌려져 있다.
특히 이 길의 하이라이트는 생태의 보고(寶庫)인 습지다. 45년간 사람들을 엄격히 통제한 군산호수에는 습지가 폭넓게 분포됐다. 아마도 호수에 수량을 채우느라 습지에서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물줄기가 분출됐을 것이다.
예전엔 원형 그대로 보존했으나 지금은 습지보호를 위해 테크길을 설치해 놓았다. 습지에는 왕버들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회갈색 굵은 줄기가 비틀려서 신비롭고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이들 나무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낀다. 물가에 줄지어 있는 왕버들나무는 수변산책길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풍경이다. 또 수변에 늘어선 왕버드나무 군락아래 흩어져 있는 샛노란 붓꽃도 결코 놓칠 수 없다.
대략 13.8km를 걸었지만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다. 부드러운 황톳길에 시선 가는 곳마다 팔색조 풍광을 릴레이로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지만 올 때마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준다. 좋은 길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자연생태계가 살아있어야 한다. 군산호수 물빛길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