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금강과 접해있는 곳에 부강면이 있다. 예전엔 청주시(옛 청원군) 관할로 강변 마을의 정취가 살아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된 이후 공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부강면에 지난 5일 의미 있는 공간이 문을 열었다. ‘가네코 후미코 다실’. 이름만 보고는 왜색 짙은 찻집으로 오해할 만 하지만 항일운동에 앞장선 일본여인을 기리는 뜻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인의 애절하고 뜨거운 삶을 들여다보면 숙연해진다.
“ 지지리 복도 없는 인생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한 환경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아나키스트” ‘박문자’로 불리는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짧고 굵은 삶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비록 비천하게 태어나 모질고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사후엔 추모의 대상이 될 만큼 고귀한 여성이 됐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 ‘막장’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미코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으로와 온갖 고초롤 겪었다. 심지어 10대에 자신의 어머니에 의해 윤락가로 팔릴뻔했다.
외롭고 신산한 삶에 좌절하는 대신 부조리한 사회와 제도에 저항했던 후미코는 3.1 운동을 목격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중이던 독립지사 박열을 만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신문팔이, 노점상, 행상, 식당종업원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후미코는 우연히 잡지 ‘청년조선’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1923년 박열과 함께 항일운동에 뛰어든다.
당시는 일본열도를 강타했던 관동대지진 이후 괴소문으로 6000여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되는 등 살벌한 시기였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내각은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연인인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사적인 재판을 받는다.
하지만 혹독한 재판과정에서 촬영된 박열과 박문자의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모습은 1927년 당시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총사퇴에도 영향을 줄 만큼 일본사회에 기개를 떨쳤다.
박열과 후미코의 실제 사진과 영화 박열의 포스터 / 박열의사 기념관
두 사람은 1926년 3월 23일 옥중에서 결혼했고 후미코는 박열의 호적에 들어갔다. 이틀 후인 25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하자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라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후미코는 법정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후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후미코는 감형 통지서가 왔을 때 오히려 분노하며 찢어 버렸다.
후미코는 그해 4월, 옥중결혼 이후 단 하루 신혼의 단꿈을 누려보지 못한 채 우츠노미아 형무소에서 23세의 꽃 같은 나이에 의문사했다.
하지만 그녀의 짧고 파란만장한 삶은 영화와 소설, 뮤지컬로 살아났다. 영화 아나키스트와 박열, 김별아의 소설 ‘열애’, 뮤지컬 ‘22년 2개월’, 전기웹툰 ‘나비’는 후미코의 불꽃같은 인생을 아프고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세종시 부강면과 후미코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친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입양된 고모부의 집이 청원 부강면에 있었다. 1917년 부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니 강변마을 부강은 한국과 일본 여러 곳을 전전했던 후미코가 그나마 가장 오래 살은 곳이다.
다실은 ‘가네코 후미코 선양사업회’가 운영한다. 부강면이 고향으로 부강면장을 역임한 향토사학자 이규상 선양사업회장은 수십 년간 사재를 털어가며 후미코 자료를 모아 ‘다실’을 꾸몄다. 그가 아니었다면 후미코 가네코와 부강면의 소중한 인연이 묻혔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