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가장 큰 묘미 중 하나는 반전(反轉)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전환될때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 잔상은 오래 남는다. 지난 주말 강원도 평창 청옥산 육백마지기 트레킹이 그랬다. 반전일 수도 있고 낮은 기대치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한 것일수도 있다.
평창으로 떠나기전엔 마음이 납덩어리가 달린 것처럼 무거웠다. 기상뉴스엔 제주발 장마가 북상한다는 소식이 잇따르고 기상청 사이트엔 나흘전부터 평창 청옥산에 온 종일 비가 내린다고 예보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출발 전날 평창군 관광안내센터로 육백마지기 샤스타데이지 개화상황을 물었더니 개화율이 20% 남짓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센터직원은 안타까운듯 “비도 내리고 꽃상태도 안좋은데 괜찮겠느냐”며 따뜻한 위로의 말까지 건냈다. 참 친절하다.
집에서 나올때도, 버스타고 출발해 평창으로 가는 도중에도 비는 부슬부슬 하염없이 내렸다. 이럴 때는 마음을 비우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악천후에 산 길을 걷는 것도 추억이다.
하지만 반전은 속리산 말티고개보다 험한 청옥산으로 올라가는 굴곡진 고갯길에서 시작됐다. 차창밖 청옥산은 비가 그치고 정상 부근엔 구름에 둘러쌓여 수묵화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승용차는 육백마지기 주차장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관광버스는 7부 고지쯤에서 하차해 걸어올라 가야 한다. 내처 올라가는 승용차가 부럽지는 않았다. 파도가 바다의 일인것 처럼 걷는 것은 걷기동호회인 마힐로가 하는 일이다.
마힐로는 찻길 대신 통행금지 차단기를 과감히 무시하고 임도를 따라 걸었다. 임도에 차량통행은 막아야 하지만 탐방객들에겐 개방해야 했다. 임도 좌측으로 보이는 평창, 정선 일대 고산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살짝 과장하면 네팔 산길 트레킹하는 느낌이랄까.
40여분만에 육백마지기에 도착한 마힐로는 샤스타데이지 군락을 보며 다소 놀랐다. 관광센터 직원은 최근 며칠동안 이곳에 다녀가지 않았나보다. 만개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70%는 피었다. 기대 이상이다. 마음속에서 엔돌핀이 쏫아올랐다.
사실 샤스타데이지 군락이 특별한 감흥을 준 것은 아니다. 전국 각지의 풍경 맛집을 찾아다니다보면 더 매혹적인 곳도 많다. 내가 정말 감사한 것은 날씨다. 평소처럼 맑게 개었다면 그래서 뜨겁고 강렬한 햇볕이 육백마지기에 쏟아졌다면 더위에 지쳐 이날의 감동은 반감됐을 터다.
하지만 비가 내린뒤 청옥산 하늘은 연극무대의 조명처럼 마힐로가 머문 한시간 동안 거의 10분 단위로 변화무쌍한 풍경을 연출했다. 짙은 운무가 내려앉거나, 부드러운 햇볕이 비추거나, 먹구름이 지나가거나, 감미롭고 선선한 동남풍이 카멜레온처럼 바뀌며 초여름의 열기를 쫓아버렸다.
청옥산이 소재한 평창군 미탄면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도중 제천 천둥산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는데 날카로운 햇볕과 한증막같은 더위가 엄습했다. 그 순간 서늘한 바람과 운무속에서 걷던 육백마지기 샤스타데이지길이 잔상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