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섭씨 30도가 넘는 폭염이 일상화됐다. 기상학자들은 117년만의 기록적인 더위라고 한다. 하지만 찜통더위도 예외는 있다. 주말인 12일 찾아간 강원도 양양 설악산 주전(鑄錢)골(오색약수터~용소폭포)이다.
새벽에 출발해 오전 9시30분쯤 오색약수주차장에서 도착했더니 의외로 공기가 향긋하고 상쾌하다. 주차관리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요즘 폭염이라고 난리인데 이곳은 시원하네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덥긴요..어젠 하늘이 흐려서인지 추웠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초여름부터 주말 트레킹 때마다 기상청의 오보로 ‘장맛비’ 고비를 몇번이나 무사히 넘겼는 데 이날은 ‘폭염’이라는 허들을 가볍게 통과했다. 역시 폭염도 설악산에선 맥을 못춘다.
풍광은‘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주전골은 이미 검증된 계곡이다. 남설악의 큰 골 가운데 가장 수려한 계곡으로 꼽힌다. 사람들은 단풍철을 최고로 치지만 단풍잎보다 더 많은 인파에 치일까봐 가을엔 올 엄두도 못낸다.
지난 3월 일본 여행전문가들이 한국절경 30선으로 꼽은 곳이니 뭔 말이 더 필요할까. 젊은 시절부터 이 곳을 찾을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초입에서 흔들다리를 건너 초록 숲길에 들어서자 계곡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시원하다. 매일 폭염 특보를 전하는 기상청의 호들갑 때문인지 탐방객이 은 많지않아 길은 한적했다.
계곡속으로 들어갈수록 주전골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가몸에 계류는 풍성하진 않지만 양손에 담아 떠먹어보고 싶을 만큼 맑고 투명하고 하늘높이 솟은 기암괴석은 퍼레이드를 하는것처럼 이어져 마힐로 회원들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그 옛날 도적 떼들이 숨어들어 위조 엽전을 만들었을 만큼 깊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며 길 아래 선녀탕과 하늘 밑 독주암을 바라보니 머리가 개운해 진다.
억겁의 세월, 자연이 빚어낸 작품들 사이를 걷던 친구가 독주암을 카메라에 담으며 “굳이 돈 써가며 중국 장가계까지 안가도 되겠다”고 한다. 동감이다. 마치 선계로 들어가는 듯한 신비롭고, 맑은 계곡과 폭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설속의 신선과 선녀가 산다면 바로 이 곳이 아닐까.
오색약수터에서 용소폭포 입구에 이르는 3km의 주전골은 설악산을 통틀어 가장 쉬운 코스다. 그래서 이 더위에 화사한 아웃도어를 곱게 차려 입은 어른신들도 눈에 띈다.
그래도 명색이 ‘악(嶽)’자가 들어가는 큰 산이다. 아무나 들이지 않겠다는 듯 작은 바위산은 넘어야 한다. 용소폭포를 보려면 철제계단을 통해 10분 정도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데 맨 윗 전망대에서 보이는 ‘뷰’가 장난이 아니다.
주전골 일대의 전망을 둘러보고 다시 반대편 철제계단으로 내려가면 천 년 묵은 이무기가 살았다는 용소폭포가 숨겨둔 비경을 드러낸다. 폭포가 보이는 바위턱에 앉아 준비해온 얼음물로 목을 축였다.
7m 깊이의 옥빛 계류가 춤을 추며 하류로 쏟아지는 폭포에 몰입하다보면 일상의 번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다.일행이 없었다면 딱 한시간동안 홀로 이 분위기에 도취해보고 싶었다.
고려 문신 안축은 저서 '관동별곡'에서 한반도 대표급 명산을 비교하며 설악산은 ‘수려하고 웅장하다’는 시를 남겼다. 나 역시 금강산도 가보았고 지리산도 수없이 방문사람으로서 그의 평가는 공감하지 않지만 설악산은 제대로 짚었다. 한여름에도 냉기를 품은 설악산은 올 때마다 기대 이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