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티 엔지’ 앙겔라 메르켈.

by 박상준

버락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유색인종 출신 대통령이다. 중동평화회담 재개와 핵무기 감축으로 2009년엔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그가 지난해 회고록 '약속의 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 24시간 만에 89만 권이 팔려 미국 출판시장에서도 유례없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정치인들의 회고록은 주로 대필 작가가 대신 써주기도 하지만 오바마는 본인이 회고록을 쓸 수 있는 지적 역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런 오바마가 신간 회고록에서 각국 전 현직 지도자에 대해 진솔한 평가를 내놓았다. 중국 후진타오 전 총서기는 '날 졸리게 만든다'고 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뉴욕·시카고의 동네 보스 같은 감정 없는 인물', 프랑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과장된 수사를 써 대화는 재미있지만 짜증난다'고 했다.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수상은 '도시적이고 자신감 있으며 살면서 크게 고생 안 해 본 사람'이라고 평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 대한 평도 있다. '농담이나 통찰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긍정적인 면 때문에 나중엔 존경했다'고 썼다.

오바마가 가장 칭찬한 인물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하며 지적으로 정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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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은 20여 일 전 취임 16주년 만에 퇴임했다. 장기 집권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8년간 권좌를 지킨 것을 비교하면 독일 정치제도의 특수성을 감안해도 대단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지지율이다. 이 정도로 오랜 세월 집권했으면 국민들이 식상해하거나 부정부패나 정책의 오류로 인기가 시들만도 한데 외려 퇴임 직전 지지율이 80%에 달했다.

이젠 전 총리가 된 메르켈의 인기엔 대체 어떤 비결이 있을까.

미국의 저널리스트 케이티 마튼은 저서 ‘메르켈 리더십 : 합의에 이르는 힘’에서 ‘경청과 소통’을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꼽았다. 인기와 칭찬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인내와 설득으로 성과를 내는 정치를 추구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유연함과 겸손함으로 당파를 뛰어넘어 모든 독일 국민의 총리로 일했다.

경제적으로도 성공했다.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독일은 메르겔 집권 기간 동안 재정 흑자를 내면서 낮은 국가 부채비율을 유지하는 등 재정을 건실하게 운영해왔다. 또 이번 코로나 사태에도 한국, 일본, 미국처럼 현금을 살포하는 대신 공공의료와 실업수당 등 사회보장제도 지원, 친환경에너지 요금 인하, 중소기업 및 지자체 지원 등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하지만 메르켈의 진짜 비결은 '무티 엔지'(엄마 앙겔라)라는 그의 별명에 숨어있다. 그는 주말에는 직접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매일 남편을 위해 아침 밥상을 차려준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두 살 아래지만 얼굴에 주름이 잔뜩 있고 펑퍼짐한 아줌마 같은 인상이다.

샤넬 디자이너 ‘칼 라거벨트’로 부터 의상이 촌스럽다고 독설을 들을 만큼 검소하고 소박한 인품의 소유자다. '유럽의 여제'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결단력과 추진력을 갖추고 있지만 결코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학습기계'라는 또 다른 별명처럼 때론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배우려는 모습을 보였다.

메르켈은 국가지도자로서 무엇이 소중한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실천하지 못하는 현란한 수사(修辭)와 '포퓰리즘' 그리고 법치를 교묘하게 파괴하면서 국민을 현혹하는 이 땅의 정치권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후보의 비호감도가 최고치를 달리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7%는 둘 다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선 이후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정치권에 메르켈 같은 후보가 있다면 우리나라 정치 지형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희망 사항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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