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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Jan 22. 2022

'겨울왕국'에서 내려오니 잠시 꿈을 꾼 듯했네.

광주광역시 무등산 옛길 2코스 눈꽃 트레킹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영화 '겨울왕국'으로 들어선 듯했다.

서석대가 보이는 8부 고지에 진입하자 엘사 공주 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이 부른 'Let it go'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 고혹적인 설경이 말 그대로 느닷없이 눈앞에 다가왔다. 

해발 1183m의 무등산 서석대 주변은 수은주도 달랐고, 바람의 강도도 달랐으며 풍경은 더더욱 달랐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듯 느낌이었다. 

단순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격렬한 유산소 운동을 했을 때처럼 도파민이 분출됐다. 마치 경이로운 책이 펼쳐지듯 눈부시게 맑고 명징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역시 겨울산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늘 반전이 기다린다. 그래서 설산을 즐겨 찾는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무등산 옛길(2코스)을 걷기 위해 들머리인 해발 356m에 위치한 천년고찰 원효사 주변에 도착했을 때 눈을 씻고 살펴봐도 눈(雪)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바람도 없는 건조하고 화창한 하늘이 잠시 계절을 잊게 했다. 

명색이 눈꽃 트레킹인데 설경으로 유명한 무등산에서 눈을 볼 수 없어 살짝 조바심이 났다. 눈 꽃을 보러 가자는 나의 유혹에 먼길을 함께 온 지인은 내색은 안했지만 얼굴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요즘 도심에선 눈을 보는 것도 밟는 것도 쉽지 않다. 기상청은 올 겨울에 눈이 많다고 예보했지만 그 눈은 대체 언제 마음껏 볼 수 있을까. 운전할 불편해도 겨울엔 눈이 내려야 한다.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를 보면 마음마저 새뜻해진다. 

간혹 한여름 스쳐 지나가는 장대비처럼 눈발이 흩날릴 때도 있지만 쌓이는 경우는 드물다. 금세 녹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겨울산의 매력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고 마음을 씻어주는 순백의 숲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인들도 바로 그 맛 때문에 순순히 나의 제의에 순순히 응했을 터다.  

하지만 어쩌랴. 겨울 가뭄에 설경은 못 만나더라도 미세먼지가 물러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서석대를 향해 올라가는 길은 유난히 조릿대 군락이 많았다. 우린 마음을 비우고 조릿대 사이로 길을 낸 완만한 숲길을 걷고 때론 자연석을 계단 삼아 산길을 오르며 무등산의 랜드마크 서석대로 향했다. 1월이지만 봄날처럼 포근해 조릿대는 더욱 푸르렀다.  

7부 고지쯤 올라가자 오르막이 가팔라지면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등산객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는 '목교'에 도달해 산 위를 쳐다보니 멀리 서석대가 보인다.


'목교'에서 서석대까지는 500m 거리다. 멀지는 않지만 급경사에 돌길이다. 돌 길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눈과 조우했다.

눈이 쌓인 돌 위는 무척 미끄럽고 아이젠을 차지 않으면 자칫 넘어질 수 있지만 왠지 조짐이 좋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지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산 길을 걸은지 2시간 만에 등장한 서석대는 깜짝 놀랄 위용을 보여주며 조물주가 디테일하게 세공(細工) 한 것처럼 하나하나 돌을 깎아 세운듯한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경사가 심해 서석대 앞 전망대에 올라야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주상절리(서석대)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누군가 세워놓은 거대한 비석처럼 서있는 서석대는 수천만 년 동안 풍화와 침식을 통해 만들어진 화산체다. 그래서 자연이 만들어놓은 조각품이다.

하지만 나를 더욱 감탄하게 만든 것은 서석대 주변 숲을 환하게 밝힌 상고대와 눈꽃이었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눈 속에 파묻힌 진정한 겨울산이었다. 표고차 700m는 산의 계절뿐만 아니라 풍경도 바꾸어놓았다.  



서석대 앞에는 마치 대자연이 일부러 세워놓은 것처럼 비슷한 높이의 돌기둥 2개가 눈을 머리에 이고 우뚝 서있다.  

주변 나뭇가지에 붙은 상고대는 영롱하게 빛나 서석대까지 힘들게 올라온 등산객들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정상에 올라 좌우로 힘차게 뻗은 백색 능선의 풍광을 마음껏 즐겼다. 시인 최승호가 시 '대설주의보'에서 묘사한 대로 밤새 내린 눈보라는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을 점령했다. 

역시 설산의 능선은 눈 때문에 더욱 장엄하고 신비로운 아우라를 뿜어낸다. 

정상에 서서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세찬 바람이 눈을 흩날릴 때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있던 헛된 욕망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풍경은 내 안에서 태어나고 나는 풍경 안에서 태어난다”는 명말청초의 화가 석도의 말이 떠올랐다.         

황홀경을 뒤로하고 다시 원효사로 내려오자 겨울이 아닌 포근한 초봄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절 잠시 꿈을 꾼듯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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