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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Jan 25. 2022

승자독식의 나라

공직생활을 일찍 정리하고 자신의 장기인 ‘강의’에 전념하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강의 준비를 위해 도심에 열평 규모로 장만한 그의 연구실엔 늘 친구들이 북적거립니다. 그래서 틈날 때 마다 친구들이 찾는 연구소는 사랑방 구실을 합니다.


연구소에선 시간되는 친구들끼리 함께 식사하고 차만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레 풍문(風聞)이 모이거나 흩어지고 때론 사회현안에 대해 열띤 ‘공론의 장’이 펼쳐집니다.


오랜 직장생활 또는 사업경험을 통해 내공이 쌓여 나름 경륜이 있다고 자부하는 몇몇 친구들은 평론가 뺨치는 논리로 불꽃튀기는 토론베틀을 벌이기도 합니다. 옆에서 보면 조마조마 하기도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념적 성향이 틀려도 결정적인 순간에도 서로 일정한 선을 지켜와 얼굴 붉힐일은 없었죠.


하지만 대선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화기애애하던 연구소에 균열이 생길 조짐을 보여 걱정입니다. 누굴 지지하느냐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견해차가 감정대립으로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듯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소통에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 는 "소통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장애를 하나만 꼽자면 자신이 소통이 잘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했죠.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말을 잘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소통이 잘되는 것은 아닐겁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주장과 논리가 강해지고 그것을 주변사람들에게 주입시키려 합니다.


저마다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고유의 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틀은 유적적 특성을 더해 성장하면서 얻게 되는 경혐과 지식을 통해 형성됩니다. 그래서 같은 정보를 입력받아도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이를테면 프레임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드넓은 풍경앞에서 어떤 프레임(구도)으로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풍경의 느낌이 다르게 보이듯 사람들도 자기만의 프레임을 기준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인지한다는 거죠. 


이같은 현상은 나이가 먹으면 더 심해집니다. 상대는 안중에 없고 자기 기준으로 재단합니다. 그래서 '꼰대'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많아요. 꼰대는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을 비하하는 말이죠.


마음이 답답한 지인이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으면 차분히 경청하기 보다는 자꾸 뭔가 조언하고 충고하려 하죠. 물론 구구절절 바른말이고 옳은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위안이 될까요. 기껏 위로한다늘 말이 때로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가 상대방에게 상처로 남게되는 경우도 많죠.


한때 명망있던 모 스님은 칼럼에서 이렇게 썼더군요. "자기 삶을 사는 것은 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남 인생을 관여하는 것은 입만 있으면 된다"고요. 그 글을 읽는 순간 나 자신을 둘러보게 되더군요.


정신과 의사 정혜신이 쓴 책 '당신이 옳다' 에서 '충조평판'을 조심하라는 글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애정과 친분을 과시하며 주변사람들에 대해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함부로 하는 경우죠. 대체로 가방줄이 길거나 독선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중에 이런 사람이 많아요. 


이럴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유명한 대사처럼 '너나 잘하세요'를 떠올릴 겁니다.


개인간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집단간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선판이라지만 여야 정치인들을 보면 마치 적대국가에서 서로에 대한 증오를 키우며 성장해온 사람들 같습니다. 

같은 땅, 같은 하늘아래에서 태어나 멀쩡한 대학을 나오고 남이 부러워하는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여야 정치인인으로 변신하면 헐뜯고 짓밟지 못해 안달입니다. 


어디 정치뿐이겠습니까. 호모필리(동종애/同種愛)라는 말이 있조. 서로 비숫한 정치적 가치,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유튜브를 공유하고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눌러대고 단톡방에서 이모티콘을 날립니다. 


뭐 이런식으로 연대의식만 다지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문제는 배타적 집단의식으로 똘똥 뭉쳐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롱과 욕설등 언어적 린치를 가합니다. 상대 진영에 대한 배려와 이해는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독선과 증오의 정치’입니다. 지금 대선판이 그렇습니다.


사람과 고릴라의 차이는 혀의 길이 입니다. 학자들은 인간은 혀를 통한 대화와 타협으로 고릴라에 비해 분쟁을 1만5천분의 1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화로 할 수 있다면 굳이 폭력이 필요없겠죠. 

혀가 짧은 고릴라 세계는 힘으로 밀이 붙이는 승자독식의 사회가 된 반면 인간은 혀를 통해 법과 제도가 있는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번 대선은 우리가 효율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주장을 회의하게 합니다. 여야 정치권은 대화와 타협으로 상대와 소통하고 인정하기는 커녕 아예 깡그리 무시하고 상처를 주려 합니다. 전생에 원수진 사람처럼...


원칙과 상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슈와 현안도 하늘과 땅만큼 현격한 견해차를 드러냅니다. 과도한 진영논리와 승리에 대한 강박 때문에 감자를 고구마로 우기가 호박을 수박이라고 반박하는 식의 가치전도 현상이 무수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도덕상실과 가치규범이 혼란스러운 아노미현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비호감 지수가 높은 여야 유력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대선후엔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요. 상대후보에게 관용과 포용을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유력후보들은 이제껏 살아온 길과 그들이 해온 말들이 증명해 줍니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힘으로 밀어 붙이는 고릴라의 세계처럼 승자독식의 세상이 될 것 같아 암울합니다. 가뜩이나 장기화된 코시국에 지친 국민들이 대선을 걱정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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