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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Mar 05. 2022

초봄, 괴산 화양구곡길을 걷다

도산서원이 있는 경북 안동엔 '퇴계(退溪) 이황의 길'이 있지만 충북 괴산에는 '우암(尤菴) 송시열의 길'이 있다. 괴산 7개 구곡 중 오랜 명성을 지닌 화양구곡길이다. 이름부터 우암의 성향이 묻어있다. 

황양나무(회양목)가 많아 황양동이라고 불린 계곡은 우암이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중국을 뜻하는 화(華)와 일양래복(一陽來復)의 뜻인 '양'을 따 화양동이라 고쳤다.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로 불릴 만큼 거유(巨儒)였지만 우암은 중화주의자였다.


<학소대>


내 기억 속의 화양동계곡은 울창한 숲과 맑은 물, 그리고 너른 반석과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룬 절경으로 여름만 되면 삼복더위를 피해 피서객들이 몰려왔다. 도명산을 끼고 있어 등산객도 많이 찾지만 30여 년만 해도 여름철 화양동계곡은 대천해수욕장처럼 피서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우수와 함께 찾아왔던 꽃샘추위가 자취를 감춘 지난 주말은 봄을 방불케 했다. 봄은 먼 곳으로부터 오는 기척과 같은 것이다. 아스라한 기운이 밀려왔다. 햇살은 따사롭고 하늘은 눈부시게 투명했다. 

이날 화강암봉과 기암 석벽이 빼어난 도명산(해발 643m) 산행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화양구곡길을 걸었다. 


들머리인 화양 펜션 계곡 건너에 우암이 강학(講學)을 하기 위해 지은 암서재(巖棲齋)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절벽 중간에 걸터앉은 서실은 언제 봐도 정갈한 모습이다. 정명 4칸 후면 2칸의 아담한 서실인데 마루에 앉아 계곡을 바라보면 풍경이 일품일 터다. 암서재 부근 바위에는 명나라에 대한 불변의 의리를 상징하는 비례부동, 충효절 같은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송시열은 암서재를 제목으로 한시도 지었다. 

 

시냇가 절벽 사이 / 溪邊石崖闢

그 틈에 서재를 지었네. / 作室於其間

마음을 정갈히 성현의 말씀을 찾아 / 靜座尋經訓

분촌도 아끼면서 학문에 전념한다네. / 分寸欲攀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고 초야(草野)에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우암의 심경이 드러난다.


 

화양구곡길은 보통 주차장 옆에 위치한 제1곡인 경천벽에서 시작해 제9곡인 파천까지 걷는 길이다. 파천까지는 약 3.1km 거리로 왕복하면 6km 남짓이다. 40여 년 전엔 차도 다녔다고 하는데 지금은 차량통행을 막아 걷기 길로만 이용할 수 있다. 

도명산 정상까지 다녀오느라 다소 피곤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걸을 만한 길이다. 아마 송시열도 도명산을 수시로 오르내리고 때로는 파천까지 걸었을 터였다. 자기 스스로 화양동주(華陽洞主)라고 부르고 직접 화양구곡의 위치를 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은 3㎞ 구간의 구곡에 경천벽(제1곡), 운영담(제2곡), 읍궁암(제3곡), 금사담(제4곡), 첨성대(제5곡), 능운대(제6곡), 와룡암(제7곡), 학소대(제8곡), 파천(제9곡) 등 이름을 붙였다. 그 옛날 우암이 제자들과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시도 짓고 성리학을 논했던 광경이 떠오른다.

암서재를 뒤로하고 첨성대를 향해 걸었다. 날씨는 확 풀렸지만 그렇다고 얼음이 완전히 녹은 것은 아니다. 계류는 경쾌한 소리를 냈지만 응달에선 얼음 밑으로 흘렀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계곡 풍경은 나름 운치가 있었다. 길 옆 숲 속의 헐벗은 나뭇가지는 물이 오른 듯 생기가 넘쳤다. 


능운대와 와룡암을 거쳐 학소대에 이르렀을 때 큰 바위가 시루떡처럼 첩첩이 쌓여있는 광경에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보기 위해 다리 위에 올라서니 계곡 남쪽에서 따스한 바람이 휘감아 돌았다. 한낮 수은주가 올라가면서 두툼한 패딩과 넥워머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수직절리와 수평 절리가 하늘을 향해 당당히 서있는 학소대 밑은 한겨울처럼 두툼한 얼음이 깔려있었다. 겨우내 움츠렸던 매화가 필 때쯤이면 얼음이 흔적 없이 녹을 것이다.


<우암 송시열이 강학했던 암서재>


계곡을 내려다보며 걷는 산길은 워낙 부드럽고 차분해 걷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화양동자연학습원에서 유턴해 돌아가는 길은 살짝 내리막길이다. 왕복으로 걷는 길이지만 방향이 다르니 느낌도 다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 햇볕이 쏟아지고 매끈한 반석 위엔 새들이 옹기종기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우암이 걸은 길은 다를지라도 풍경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곡은 겨울 반 봄 반이다. 한 달 뒤에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봄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어지럽고 아른거리는 풍경 앞에서 봄을 만끽 할 수 있을 터다.

들머리를 삼았던 암서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뒤 화양팬션에서 송이버섯 꿀차를 얻어마셨다. 주인장에게 요즘도 여름엔 화양구곡에 피서객들이 많이 오느냐가 물었더니 고개를 흔든다. 주인장은 "예전처럼 피서인파가 많지 않다.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랬다. 예전엔 물놀이를 하러 계곡에 왔지만 지금은 캐러비안베이나 다양한 워터슬라이드 시설이 있는 스파캐슬 같은 곳을 찾는다"고 했다. 피서 트렌드도 바뀌고 피서지로서 화양구곡의 명성도 빛이 바랬다. 그나마 봄·가을 길을 걷기 위해 온 사람들은 제법 있다고 한다.


하지만 화양구곡길이 각광을 받으려면 풍광이 다채롭고 수려한 계곡과 접한 오솔길을 더 길게 조성하고 대유학자 우암의 스토리텔링을 어필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계곡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밋밋하고 평이한 길에서 화양구곡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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