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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Sep 25. 2022

스님들도 심난해할 '핏빛 그리움'

전남 함평 용천사~영광 불갑사 꽃무릇 트레킹

꽃무릇은 참 아이러니한 꽃이다.

이파리가 져야만 꽃이 피기 때문도 아니고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해 서로 그리워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때문도 아니다. (그래서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왜 하필이면 9월이 되면 전남 영광 불갑사와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처럼 남쪽 지방의 천년도량 주변에만 무리 진 꽃무릇이 활활 타오르는지 모르겠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슬픈 기억’이라는 꽃말과 ‘붉은 정열의 꽃’, ‘핏빛 그리움’이라는 시어(詩語)로 상징되는 꽃무릇의 야리야리하고 요염한 자태는 불도를 닦는 신성한 사찰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명상과 수도를 하는 스님들은 이 가을, 정념(情念)의 불길처럼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을 보며 마음이 심란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 꽃, 의외로 전통사찰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절의 나지막한 기와 담장과 풍경(風磬)이 달린 처마 밑, 소나무 숲 아래에 가녀린 꽃대에 의지해 하늘거리는 꽃무릇 군락을 보면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누구는 절에서 일부러 심었다고도 한다. 불경을 책으로 엮거나 탱화를 그릴 때 알뿌리의 알칼로이드 성분을 섞으면 좀이 슬거나 변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그 세 곳의 사찰만 꽃무릇으로 유명해졌을까. 전통사찰에 불경과 탱화는 흔한데 말이다. 

그 9월의 ‘전령사’인 꽃무릇 단지를 보러 용천사와 불갑사를 다녀왔다. 대한민국에서 꽃무릇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이 간 날은 공교롭게도 꽃무릇축제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떠나기 전날 영광군청에 문의했더니 꽃은 살짝 빛이 바랬다고 했다. 절정이 지났으니 은근히 걱정이 됐다. 그 먼 곳까지 가서 시든 꽃을 보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함평 용천사는 진입로부터 꽃무릇이 줄을 지어 갈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일주일 전엔 차량행렬로 길이 미어터졌을 용천사 주변은 이날 비교적 한산했다. 절 입구의 생기 잃은 꽃무릇에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절 구경에 나섰다. 마치 노래하는 듯 리듬을 살린 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경내에 울려 퍼졌다.

용천사에서 영광 불갑사로 가려면 모악산을 넘어가야 한다. 절과 절을 잇는 산길은 어느 곳이든 유서 깊은 길이다. 아마도 천년전부터 스님들이 왕래하며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길일 터다.

절 뒤편 모악산 오르막길을 향해 출발했다. 제법 가팔라 10여 분간 낑낑대며 오르면 이후엔 줄곧 내리막이다.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구수재에서 불갑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졸참나무와 소나무숲의 완만한 오솔길은 불갑사 방향으로 틀면서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처럼 갑작스레 ‘붉은 꽃길’이 펼쳐진다. 자연의 조화일까. 산 벼랑에도 꽃무릇이 가득하다. 용천사의 생기 잃은 꽃을 보고 어두웠던 마음이 한순간 밝아졌다.



이잠 시인이 시 ‘꽃무릇’에서 “지나갈 테면 빨리 지나가라 했지요 한참이 / 지난 뒤에도 그 자리에서 꿈쩍 않네요 / 머무를 테면 머물러 봐라 했지요 마음은 / 지천으로 흘러 붉게 물들이대요”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 꽃이 발목을 잡는 듯 금방 지나치지 못할 황홀한 풍경이다.

 모악산 지름길을 통해 용천사에서 불갑사로 가는 길은 넉넉잡고 1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길의 30분 정도는 꽃길을 통과하게 된다. 물론 셀카를 찍다 보면 더 걸릴 수 있다. 꽃길의 끝은 불갑사 저수지다. 저수지 주변도 꽃무릇 천지인데 사찰에 접한 둑은 웬일인지 싱싱한 꽃무릇으로 뒤덮여 탐방객들의 카메라 세례를 듬쁙 받고 있었다. 늦게 온 손님들을 위한 새로 차린 상처럼. 



용천사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큰 불갑사는 올 꽃무릇 축제의 마지막을 즐기러 온 탐방객들로 저잣거리만큼이나 붐볐다. 사찰 입구 쪽 수만 평의 꽃무릇 군락은 빛이 바랬지만 특유의 때깔은 그런대로 살아있었다. 꽃을 보고 멀미 난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탐방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꽃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어디선가 요란스러운 호루라기 소리가 여지없이 들린다. 하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감시원들의 지청구를 듣더라고 셀카를 찍지않고 돌아가긴 힘들터다. 아마도 용천사~불갑사 트레킹을 함께한 일행은 평생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꽃무릇에 취했을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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