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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05. 2022

추락하는 불꽃 보며 마음씻는다

세종 영평사 '정화 불꽃 낙화' 의식

 탐미주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작인 ‘금각사’의 모티브는 ‘불’이다. 불멸의 미(美)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해방’을 그린 ‘금각사’에서 주인공인 사미승 미조구치는 자신이 불을 낸 금각의 불길을 바라보며 온갖 상념에 젖는다.

하지만 그는 '금각'을 태움으로써 젊음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영혼을 옥 죄던 고뇌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


 

연휴에 공주를 가는 길에 세종 장군면 영평사의 ‘정화 불꽃 낙화‘ 현수막을 보고 불경스럽게 ‘금각사’를 떠올렸다. 낙화 의식은 불을 보며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불의 정화 능력을 의지해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업을 소멸시키고 새로운 정업(淨業 / 바른행위)을 닦겠다는 서원(誓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맹세)의 행사다. 타오르는 불꽃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찰에 불이라니... 주변엔 숲이 울창한데...

행사 시간은 일몰 이후인 저녁 6시 30분이다. 하지만 공주에서 볼 일을 마치고 4시쯤 영평사로 갔으나 사찰에 진입하는 지방 도로는 차량 행렬로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갓길에 주차하고 순례자처럼 1.5km를 걸어 영평사로 향했다.

영평사는 매년 이맘때 구절초 축제로 유명하다. 영평사 뒷산은 마치 곱게 정제된 소금을 뿌려놓은 듯 새하얀 구절초 꽃이 물결처럼 온 산을 뒤덮는다. 하지만 꽃은 낮에 봐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행사 일정을 밤으로 정한 것은 절 축제의 주연이 ‘구절초’에서 어둠 속에 더 돋보이는 ‘불꽃’으로 바뀐 것이다.

 

간신히 주차하고 먼 길을 걸어서 서쪽 하늘이 노을이 질 때쯤 영평사에 도착했다. 대웅전 앞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도 드물게 연평사를 찾았지만 이날 처럼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 보았다.

일찍부터 사찰 측이 미리 준비해둔 좌석에 앉은 사람도 있고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축대, 마루는 물론 돗자리를 펴놓고 아예 바닥에 앉은 사람도 있다.



근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응시하고 있는 곳엔 무대가 없다. 무대 대신 직사각형의 네모난 대형 구조물의 상층부에 있는 철망과 도량 곳곳에는 헝겊으로 만든 긴 줄이 수천 개 달려있었다. 고작 그 것을 구경하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몰린 것일까.

  

땅거미가 내려앉고 시간이 되자 진행요원들이 재빨리 긴 줄마다 불을 붙였다. 유심히 보니 줄이 아니라 일종의 ‘심지였다’ 불꽃이 심지에서 서서히 타들어가면서 불꽃이 쏟아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마치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처럼.

“아 바로 이 장면이구나. 이것이 정화 불꽃 낙화였구나.....” 낯설고 황홀한 풍경에 들뜬 마음을 주체 할 수 없었다. 금각사의 사미승도 활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마음이 요동쳤을 것이다. 불은 불온한 마력이 있다.

폰카를 찍으려고 했더니 행사 진행요원이 나를 보고 씩 웃으며 기다리라고 했다. 어둠이 몰려오면 백배는 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직 긴 의식의 출발점에 서있다. 근데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이 진기한 의식은 계승된 것일까 궁금했다. 사찰 측은 그렇다고 했다.


낙화는 옛 부터 사찰에서 전승돼 왔다고 한다. 마음속의 부정하고 삿된 기운을 없애고 안전을 기원하는 전통 불꽃놀이로 악업을 정화하는 소재구복 의식이다. 오랫동안 단절됐다가 5년 전부터 영평사에서 재현했다.


이젠 낙화 때문에 구절초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래서 그런지 절 뒷산 구절초 군락은 방치된 꽃밭처럼 새뜻하거나 풍성하지 않았다. 아쉬움을 드러내자 아주머니 한 분이 "올가을 잦은 태풍과 날씨 탓으로 구절초 풍광이 예전만 못하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어둠이 완전히 깔린 절에는 더욱 선명해진 불꽃이 아래로 흩날리며 다채로운 그림을 그렸다. 꼼짝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불꽃에 도취됐거나 몰입된 듯했다. 아니면 무언가를 기원하고 소망할지도 모른다. 그 것도 아니면 세속의 잡념을 잠시 잊기위해 불을 보며 멍을 때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낙화는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원래 6시간 이어진 것을 단축한 것이지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언젠가 노르웨이 국영방송(NRK)이 장장 12시간 동안 장작불 타는 장면만 중계했다는 기사가 해외토픽에 실린 것을 보았다. 시청률이 높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편성이다.

불꽃은 흔히 하늘로 솟구치는데 아래로 추락하는 영평사 낙화는 어둠을 캔버스 삼아 붓질한 거장의 추상화처럼 밝고 아름답고 경쾌하게 빛났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불꽃이다. 낙화가 끝나면 이 기이하고 특이하며 놀라운 의식은 내년 가을이나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내년에도 혼탁해진 마음을 씻으러 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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