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준 Sep 19. 2022

난 서산을 붉게 물들일 수 있을까

노을 / 픽사베이

도심에 산이 있다. 어린 시절 외곽에 있던 산은 인구유입으로 도시가 팽창하면서 산을 중심으로 아파트가 밀집돼 ‘도시의 허파’가 됐다. 난 그 산 밑에 산다. 이름은 ‘구룡산’, 지극히 평이하고 흔한 산이다. 


네이버에서 구룡산을 클릭하면 전국 각지에 없는 곳이 없다. 당연히 명산이 아니다. 이름의 유래도 비슷하다. 구룡산의 형세는 아홉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九龍爭珠形)이라는데 아마도 다른 지역의 구룡산도 대동소이한 전설을 갖고 있을 것이다.

  

프리랜서인 나는 약속이 없는 한 저녁마다 구룡산을 오른다. 해발 165m에 불과하니 오른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다. 하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후문에서 산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짧긴 해도 제법 가파르다.

집에서 나와 산 능선까지 오르는 데 고작 10분 걸린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 ‘걸어볼까’라고 마음먹으면 어느새 산 능선을 걷고 있다. 아파트 분양대행사의 식상한 표현대로 하면 ‘숲세권’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숲세권’으로 이사 오기 전엔 살던 아파트 바로 옆에 시립도서관이 있었다. 직장인 시절 주말에 볼 일 보고 남는 시간엔 어린 시절 동네 만화방에 가듯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사정 상 이사를 갈 때쯤 고민을 했다. 도서관 근처로 갈 것인가 아니면 산을 끼고 있는 동네로 갈 것인가.

책과 산책을 즐기는 내게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그곳을 선택했겠지만 산과 도서관이 양립하는 동네는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청주에서는.

결론은 구룡산 밑이었다. 도서관은 매일 가지 않아도 되지만 산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시간대는 주로 일몰 20분 전이다. 습관이 되니 집에 있을 땐 그 시간만 되면 나도 모르게 가벼운 차림에 트레킹화를 신게 된다.

땅거미가 내려오기 직전 산에 오르면 숲은 적막감이 감돈다. 한낮엔 주변 동네 사람들로 붐비던 산은 저녁때가 되면 한적해진다. 그 시간엔 저녁식사를 준비하거나 저녁식사를 하러 갈 것이다. 사람들이 떠난 산은 마치 어둠과 숲이 소음을 흡수하는 것 같다. 

노을 / 픽사베이

 

구룡산의 주능선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동서 방향에도 나무 가지가 뻗은 것처럼 오솔길이 길게 나있다. 살짝 어긋난 열십자 같은 모양이랄까. 난 매일 동쪽 줄기에서 주능선이 있는 서쪽 방향을 향해 오솔길을 걷는다. 젖은 나뭇잎에서 올라온 짙은 숲 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길섶엔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흩어져있다. 


 차분한 능선은 비밀의 숲처럼 길이 좁고 나무가 울창해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컴컴하다. 더구나 이 시간엔 이 길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난 이 느낌이 좋다. 온전히 숲을 차지한 것 같다. 그 길에서 주능선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높은 성벽처럼 버티고 있다.

주능선으로 가기 직전 등장하는 작은 골짜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완만하고 밋밋한 구룡산에서 가장 업 다운이 심한 곳이다.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주능선으로 올라가다 보면 급경사에 침목이 100 개쯤 박혀있다. 이제 이 길에 이골이 난 나는 성큼성큼 침목을 밟고 주능선으로 향한다. 덕분에 허벅지와 종아리가 탄탄해지는 기분이다.

  

마지막 침목계단을 밟고 주능선에 올라가면 나뭇가지 사이로 서쪽 하늘에 붉은 광채가 눈을 홀린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늘 마음이 설렌다. 나뭇가지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노을을 바라본다. 아파트 숲 너머 길게 이어진 능선에 노을이 파도를 치는 듯하다.


 이럴 때 시인은 자연스럽게 시상이 떠오를 것이다. 난 언젠가 읽었던 그 시가 떠오른다. 시인 조병화는 ‘ 해는 온종일 스스로 열로 /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놓고 / 스스로 그 속으로 묻어간다 / 아, 외롭다는 건 /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라고 했다. 노을은 외로움도 아름답게 장식한다.

석양은 노을 때문에 외롭지 않다. 외려 더욱 찬란하다. ‘서산을 붉게 물들이며 떠나고 싶다’ 던 노(老) 정치인(JP)이 있었다. 그는 정치인생의 말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한때 뜨겁게 타올랐던 햇볕처럼 강렬했던 삶은 굳이 원하지 않아도 서산을 황홀하게 물들인다.

시간이 여유로운 내가 굳이 일몰 직전에 구룡산을 오르는 것은 노을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노을 앞에서 상념에 젖는다. 태양은 절정을 지나 소멸되기 직전에도 서산에서, 바다에서, 평원에서 더 아름다운 광채를 내뿜는구나.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구나. 그곳에서 난 서산을 붉게 물들일 수 있을지 자문해본다. 


 잠시 노을에 취해있다가 다시 능선 오솔길을 걸어갈 때쯤이면 숲은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 길에선 컴컴한 오솔길에 집중하게 된다. 달이 뜨면 달빛이, 별이 뜨면 별빛이 아련하게 길을 밝힌다. 물론 칠흑같이 어두운 길도 좋다. 밤의 숲을 음미하며 코스를 돌고 조심조심 내리막길을 타고 귀가한다. 오늘도 구룡산에게 위안과 케어를 받았다. 노을은 거의 매일 구룡산이 주는 작은 선물이다. 

작가의 이전글 씨킴의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