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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Jan 31. 2023

'혹한'에도 그 길은 아름다웠네

경북 포항 해파랑길 18코스 칠포~월포 트레킹 


한겨울 트레킹은 늘 날씨와 싸움이다. 차라리 춥다면 옷을 단단히 껴입으면 된다. 그나마 눈이 내리면 설경(雪景)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하지만 겨울비가 쏟아진다면 얘기가 다르다. 우비를 착용해도 10여km를 걸으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다. 더구나 바람이 강한 바닷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추위에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정말 최악이다. 

올해가 그랬다. 1월 첫 트레킹 일정을 잡아놓은 주말에 찬비가 내렸다. 고민끝에 보름 연기해 다시잡은 28일은 ‘한파주의보’가 발령됐다. 참 고약한 날씨다. 인원이 적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지만 무려 40여명의 소대병력이 움직이는 일이다.

하지만 강행했다. 목적지는 경북 포항 해파랑길 18코스 칠포~오도리~월포 구간이다. 새해 첫 트레킹은 주로 동해를 선호한다.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기 때문에 기분이 새롭다. 일출 시간은 아니어도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의 쪽빛 바다를 바라보며 한 해를 설계하고 새 희망을 가슴에 품는다.



주 초부터 '한파'가 몰려온다는 언론의 호들갑에 노심초사 했지만 막상 도착한 칠포해변은 한파는 온데간데 없고 그냥 적당히 추웠다. 흐리다는 예보도 틀렸다.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티없이 맑았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기상청 예보는 반만 믿어야 뱃속이 편하다.

서늘한 겨울 햇볕을 받으며 오도리 방향으로 출발했다.언덕위에서 뒤돌아 칠포해변을 바라보니 하얀포말이 백사장을 뒤덮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1km의 바닷길과 데크길을 번갈아 걷다보면 언덕위에 뱃머리를 형상화한 해오름전망대가 매달려 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배를 반쯤 잘라 절벽에 붙인 것 같다. 아마도 정동진의 명소인 산위로 올라간 배 모양의 호텔 썬크루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전망대도 이렇게 만들면 풍경도 달라진다. 데크길에서 해오름전망대로 내려오니 바로 배의 갑판에 들어선 기분이다.



전망대의 갑판아래엔 에머랄드빛 물결이 넘실거리고 좌우로 해안가 경치에 눈맛이 시원하다.우리 일행중 한사람이 뱃머리 끝에서 양쪽팔을 벌리고 영화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 코스프레를 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할을 할만한 남자가 있었다면 훨씬 그럴듯해 보였을터다. 정면의 수평선이 산뜻한 푸른색이다. 아마도 아침일찍 이곳에 왔다면 가슴벅찬 해돋이를 했으리라

오도리로 가는 길엔 한가심이, 검댕이, 섬목등 올망졸망한 포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포구 주변엔 등대가 조형물처럼 서있는데 죄다 빨간색이다. 멋을 부린걸까. 아니다. 빨간등대는 바다쪽에서 항구를 볼때 배가 등대 왼쪽으로 드나들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하얀등대는 오른쪽으로 드나들어야 한다. 물론 밤에는 같은 색의 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다시 월포를 향해 포구를 지났다. 작고 개성있는 카페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철없는 카페’, ‘고레카페’ 그리고 "우리, 지금, 여기...당신과 함께 참 좋다'는 문구를 벽에 써놓은 ’#742’도 있다. 

그 중엔 ‘윤치과’라는 간판도 보인다. 스케일링이라도 하기위해  이곳을 찾았다간 낭패다. 이름만 치과일뿐 ‘카페겸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갯마을 차차차’라는 드라마에 편승한 상혼이다.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이가리닻전망대다. 하늘에서 보면 물고기가 힘차게 꼬리치며 큰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그 끝은 이곳에서 약 251km 떨어진 독도를 향하고 있다. 

굳이 먼 길을 걷지 않아도 오로지 이 곳을 찾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고 한다. 이날도 영하의 날씨지만 많은 사람들이 코스의 시그니쳐 풍광인 이가리닻 전망대를 찾아 동해를 만끽했다.

 

전망대 뿐만 아니라 높이 10m, 길이 20m의 전망 데크 아래엔 지질공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눈부시게 투명한 바다위에 태고의 자연이 빚은 바위가 감탄을 자아냈다. 연인과 함께 온 20대 커플 몇명이 원기둥 교각과 갯바위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건지고 있었다.


전망대 아래 해안산책로에는 기암괴석의 보고(寶庫)다.하나하나의 자태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월포리가 속해있는 청하현 현감으로 2년간 재직했던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이 곳을 자주 찾아 그림을 그릴만큼 훌륭한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과도하게 멋을 부린 조형물은 자연을 훼손시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닻전망대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멋진 조화를 이뤘다. SNS에 올라 온 수많은 인증샷들이 증명한다.

이가리닻전망대에서 월포는 지척이다. 걷는 내내 강약을 반복하며 불었던 거친바람도 월포에 들어서자 잦아들었다. 수은주도 올라가 월포에 도착했을땐 두터운 방한복때문에 외려 땀이 날 정도였다.



해파링길 18코스의 거리는 대략 20km에 달한다. 트레킹 카페 마이힐링로드는 이날 4시간에 걸쳐 칠포에서 월포까지 10.5km를 걸었다. 워낙 포토존들이 많아 셀카를 찍느라 좀 늦었다. 시간때문에 풀코스의 날머리인 화진까지 걷지못해 아쉽긴 했지만 칠포~월포 구간안에 영일만의 엑기스 같은 풍경이 모두 담겨있다.

뱃머리를 연상시키는 해오름전망대, 물고기가 동해를 향해 용틀임하는 듯한 이가리닻전망대 등 바다위에 설치해놓은 대형 조형물이 바다의 표정을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을 끈것은 바닷길의 디테일한 풍경이다. 한적하고 서정적인 포구와 작고 허름하지만 개성이 넘치는 카페, 무엇보다 지질박물관이라고 할만큼 기기묘묘한 바위와 거친 파도소리가 시청각을 자극해 한참동안 잔상(殘像)으로 남을 것 같다. '우리, 지금, 여기...'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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