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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Apr 11. 2023

하화도, 4월의 추억

전남 여수 하화도 꽃섬길 걷기 여행

소설가 김훈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쓴 ‘칼의 노래’ 첫 구절은 ‘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임진왜란 중 백성들이 버리고 떠난 섬마다 어김없이 봄꽃이 피었다. 난리통에도 혹독한 겨울이 가고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찾아오면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 한들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버려진 섬 중에 하나가 전남 여수 앞바다에 있는 하화도일테다. ‘꽃섬’이라는 이름을 지은이도 이순신 장군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은 왜구의 노략질에 섬 주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한 공도(空島) 정책을 펼쳤다.

 

이후 수백 년간 사람의 발자취가 끊어진 섬. 그래서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섬, 하화도는  조선말 이후 유인도가 됐다. 그 후 백 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섬 중에 하나다. 

 

2년 전부터 계획을 잡고도 코로나19 때문에 차일피일 미뤘던 하화도를 8일 다녀왔다. 하화도로 출항하는 배를 타려면 여수의 남쪽 끝자락 낭도선착장까지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백야도선착장은 이미 하화도행 티켓이 한 달 전 매진됐다. 섬의 인기를 반영한다. 

시골간이역만도 못한 낭도여객터미널에서 티켓팅을 마치고 오전 11시 15분 하화도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탔다. 얼핏 보면 폐선처럼 곳곳이 녹슬고 낡은 배의 좌식 객실엔 콩나물시루처럼 탐방객들로 가득 찼다. 하화도까지 소요시간은 30분. 

멀리서 어렴풋이 떠있던 하화도는 배가 다가가면서 수려하고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500년 전 이순신 장군도 진달래와 동백꽃, 선모초 등 원색의 꽃들이 지천인 4월에 꽃섬 주변을 지나가며 7년 전쟁 지휘로 지친 마음을 달랬을 테다.


이날 하화도에 들어가는 날은 세 가지가 퍼즐을 맞춘 것처럼 멋지게 조화를 이뤘다. 날씨, 코스, 풍경이다. 아마도 4월이라 가능했으리라.


하늘은 바라보기가 부담스러울 만큼 쾌청했다. 물론 심술궂은 바람이 때론 세차게 불기도 했지만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했다. 며칠 전 내린 비에 미세먼지가 사라진 탓이다. 그래서 깨끗한 햇살에 바다는 윤슬이 반짝이고 유채꽃과 영산홍 군락은 더욱 산뜻한 자태를 드러냈다.

해안선 길이가 6.4km에 불과해 자동차든 오토바이든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는 하화도는 걷는 코스도 안성맞춤이었다. 백야도로 돌아오는 배 시간(오후 4시)에 맞춰야 해서 하화도에 허락된 시간은 4시간. 해안선을 따라 순환형으로 원점 희귀하는 ‘꽃섬길’은 5.7km 다. 처음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지 않을 걱정 했지만 기우였다. 


선착장에서 좌측이든 우측이든 어느 쪽으로 시작해도 좋다. 큰산전망대, 순너밭넘, 깨넘전망대, 출렁다리, 시짓골전망대등 쉽게 지나치기 힘든 포토존들이 즐비해 풍경을 음미하며 여유있게 걷기에 최적의 시간이었다. 외려 시간이 빡빡했다는 느낌이 들만큼 볼거리가 풍성했다. 

또 사방에 바다가 보이는 구릉지형에 소나무와 후박나무가 울창해 밀림같은 숲 속엔 지루하지 않게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있고 나무데크로 가파른 해변으로 내려갈 수도 있어 걷는 내내 운동량도 만만치 않다.


하화도엔 ‘시그니처’라고 할만한 압도적인 풍광은 없다. 하지만 막산전망대에서 깻넘전망대까지 절벽을 이어주는 100m의 출렁다리에서 탁 트인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오랜 시간 파도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해식애 바다절벽과 어우러진 꽃밭 풍경은 장관이다.


우리 일행이 간 날은 동백꽃은 졌지만 대신 유채꽃과 영산홍이 절정이었다. 특히 섬의 동쪽은 유채꽃밭이 점령했다고 할 만큼 온통 샛노란 풍경에 마음이 황홀해졌다. 제주도와 청산도의 광활한 유채꽃 군락도 일품이지만 하화도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하화도에서 트레킹 거리도, 소요시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휴식 같은 섬을 걷고 감상하고 느끼기 나름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유년시절 '보물찾기 놀이'처럼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 시신경을 자극한다. 

하화도는 솜씨 좋은 노련한 정원사가 잘 가꾼 ‘정원 같은 섬’이다. 가을엔 구절초 군락과 해안절벽의 노란 원추리꽃이 시선을 잡아끌지만 4월의 유채꽃과 영산홍은 마음을 홀린다. 봄엔 누가 뭐래도 하화도다. 

그래서 이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섬에 며칠씩 백배킹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MZ세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아랫꽃섬 하화도는 그런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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