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준 Jun 11. 2023

그 협곡에서 잠시 '번잡한 세상과의 결별'

전북 진안고원길 9코스 운일암반일암길


번잡한 세상에 처연한 결별을 고하고 떠나온 사람들이 사는 곳.

아마도 ‘운일암 반일암(雲日巖 半日巖)’이라는 지명은 세속과의 절연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깎아지른 절벽밑에는 길이 없어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다는 뜻으로 ‘운일암’, 온 종일 햇빛을 반나절 밖에 볼수 없을 만큼 숲이 울창하다하여 ‘반일암’으로 불렀다.  그 옛날엔 전쟁도 비켜가는 오지였을 터다.



마이힐링로드가 10일 다녀온 전북 진안고원길 9코스는 이를테면 ‘운일암 반일암’ 협곡을 걷는 길이다. 도로가 잘 닦인 지금도 고속도로를 벗어나 이 길의 들머리인 주천면 노적봉 쉼터를 가려면 가파른 고개를 넘고 한갓진 산간 마을을 지나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2차선을 한참 동안 달려가야 한다.


하염없이 외로운 산길의 종착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면서 옛날 옛적엔 참으로 오지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쌓은 협곡은 이날따라 유독 강렬하고 눈부신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적봉 쉼터에서 걷기 시작한 운일암 반일암은 명적봉(해발 846m)과 명도봉(해발 863m) 사이를 뚫고 흐르는 기나긴 협곡 이름이다. 깍아지른 기암절벽을 휘감아 흐르는 냉천수는 크고 작은 용소와 폭포를 빚어내며 소박한 계곡미를 보여준다.


이 길은 2년전만해도 크고 작은 기암괴석과 용소를 품은 계곡숲길이었다. 고려시대 송나라 주자의 종손인 주찬이 협곡의 비경을 소문으로 듣고 다녔갔다는 설 때문에 ‘주자천’으로 불리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 그늘 짙은 테크길은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무척 시원하지만 비경(祕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설악산, 지리산, 주왕산, 오대산 등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명품 계곡길을 섭렵해왔던 마힐로에겐 왠지 단조롭고 밋밋했다. 한껏 높아진 눈을 충족시키려면 뭔가 인상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2021년 6월 단조로운 계곡길에 입체감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공중의 명소가 생겼다.  5km에 달하는 협곡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길이 220m의 웅장한 구름다리다.  진안군이 46억5000만원 들여 만든 명도봉과 명덕봉을 잇는 높이 72m 길이 220m의 아찔한 구름다리에서 바라보는 스펙터클한 전망은 장관이다.



그렇다고 거친 오르막을 오래 올라가지도 않는다. 칠은교 인근 이정표를 따라 20분 정도 산길을 올라가면 구름다리가 내려다 보이는 운일정을 만나고 이 곳에서 10분만 걸으면 구름다리에 도착한다. 체력소모도 많지 않다.  


이 다리 입구를 담당하고 있는 60대 안전관리원은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는 우리 일행에게 “골짜기가 불이 붙은듯 단풍이 화려한 가을에 오면 더 멋있다”고 했지만 다리밑에 펼쳐진 협곡의 초여름 녹음도 산뜻하다.



구름다리를 건너 원시림처럼 나무가 빽빽한 숲속을 마치 산림욕하듯 내려가는 테크계단길 풍경도 일품이다. 이 길을 내려가면 초록이 우거진숲에 일곱빛깔 페인트로 포인트를 준 ‘무지개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이 다리에서 위를 쳐다보면 ‘구름다리’가 하늘에 걸린듯 까마득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주양교로 가는 그늘 짙은 계곡데크길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만 걸어도 일단 본전은 뽑는다.


 다만 주양교에서 주천면소재지까지 1.5km는 여름에 걷기엔 부담스럽다.

가수 비의 히트곡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햇볕을 견디며 시골길을 걸어야 한다.  그나마 차가 안다녀서 다행이다.



 하지만 길의 종착지엔 이 길의 보너스가 기다리고 있다. 자연암반을 깔고 앉은 3칸짜리 와룡암(臥龍庵)이라는 누각이다.  1654년 한양에 살던 유학자 김중정이 입신양명의 꿈을 버리고 주천면에 이주해 지은 고풍스러운 누각은 세속과 절연한 선비의 고고한 인품을 반영한듯 검박하다. 세월의 풍상(風霜)이 켜켜이 쌓인 고풍스런 누각은 주자천의 용소와 어울려 한폭의 한국화를 그려낸다.


 운일암 반일암은 세파에 찌든 사람들이 꿈꾸는 무릉도원은 아닐지라도 세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은근한 마력이 있는 계곡이다.   2021년산 구름다리와 1654년산 누각을 이어주는 계곡숲 데크길은 진안고원길 9코스에서만 볼 수 있는 파노라마 풍경이다.








작가의 이전글 월리사 금계국이 만든 6월 황금물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