샵을 오픈했다.
인테리어도 할 필요 없는 아주 작은 곳이었다.
쇼핑몰 타워에 자리 잡은 오픈형 공간으로 4평이 채 안 되는 곳이었다. 페인트도 직접 바르고 발품을 팔아
가구도 직접 들여놓았다.
(가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진짜 4 평남짓)
전문가의 힘을 빌리지 않아 인테리어에 200만 원가량의 돈이 들었다.
네일숍은 초기 재료비용이 많이 들긴 한다. 지금은 한국 제품도 많고 구하기도 쉽지만 그때만 해도 종류가
많지 않아 가격도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네일 좀 해봤다고 재료욕심은 있어가지고. 초기 창업비용이 들긴 했지만 인테리어 욕심을 현저히
내려놓고 셀프로 진행한 덕에 예산 내에서 오픈준비를 마쳤다.
돈이 없으니 목 좋은 곳은 쳐다도 안 봤다.
최고로 구석진 자리에 쓰다 버린 창고 같은 공간을 내 첫 샵으로 결정했다. 월세마저 상상초월로 저렴했지만
그에 비해 주차도 좋고 접근성도 좋아 망설임 없이 한 번에 결정했다.
이 정도 월세면....적어도 망하진 않겠다
최소 하루 한분만 오셔도 샵은 유지가 된다. 심지어 유지가 되고도 남는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나는 자리를 비우지 않고 오는 손님을 정성스럽게 받았다.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샵은 나름 번성을 거듭해, 어느새 나는 근처 네일숍 중에서도 잘하기로 소문난 샵이 돼있었다.
(그즈음 이미 경력은 만렙)
샵 운영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내 샵이든 아니든 하는 일은 똑같았다.오히려 내 샵이니 매출도 신경 안 쓰이고
오는 손님 받고 남는 시간 커피 마시며 우아한 시간들을 보냈다.
아.. 그리고. 혹이 하나 붙었다.
빅 혹
우리 샵 바로 옆에 그 옛날 원장님이 샵을 냈다.말릴 수 없었다.자기가 자기 돈으로 월세를 구한다는데
뭐 할 말이 없었다. 나 없는 사이 반영구를 배운 모양이었다.
반영구는 지나가는 사람을 유치하긴 어려운 시술이다. 네일숍은 지나가는 사람을 유치하기 쉬운 시술이다.
옆으로 온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샵을 하라고 부추긴 이유였으려나.
목적이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나나 원장님이나 잘된 일이었다.
원장님은 동네방네 내 오픈을 떠들고 다녀줬다.옛날 손님들을 불러들였고 지인들도 많이 불러들였다.
덕분에 샵을 정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큰 손님들이 많이 오셨고,샵 초기 안정적인 샵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됐다.
원장님도 수해는 있었다.
커피, 과자, 종이컵, 메모지, 볼펜까지 모두 가져다 썼다.
페인트만 급하게 칠하고 배드 하나를 들린 다음 나머지 모든 것을 우리 샵에서 해결하셨다.
그 정도는 이제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시술 시간을 제외하곤 늘 우리 샵에 와계셨는데 물론 목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시술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상관없었다. 저 원장님이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내가 편하다.
그 시절 무리하게 벌인 사업으로 원장님에게 남은 건 빚뿐이었다. 전 남편분과 헤어지는 조건으로 빚의
대부분은 남편분이 떠안은 모양이었고, (왜지?)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을 터.
남은 아들을 원장님이 맡아 키우는 상황이었다..어린아이를 보고 있자니
그러면 안 되는데 또 마음이 갔다.
일단 일적으론 말을 잘하니 장사가 나쁘지 않았다.
치장하기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한지라 손도 빨랐다. 다행이었다.
어린 나이에 종이컵 같은 건 얼마든지 가져가도 되니까 다시 망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원장님아.
일하는 내내 말 섞을 일도 없었다. 나는 손님이 많아 바빴고,
원장님도 어딘가를 바쁘게 다니곤 했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가끔 30만 원씩 카드를 긁고 내가 가진 현금을 받아갔다. 뭐 하러 굳이 카드를 긁고 현금으로 받아갈까.
어차피 카드값이 나올 텐데..
그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현금서비스 이자율에 비하면 무이자에 바로바로 돈을 내어주니
내가 원장님에겐 무이자 현금서비스 ATM 기였구나 싶다.
참.. 저렇게도 사는구나.. 이마저도 생돈이나 안 꿔가면 다행이란 생각으로 지냈다.
이렇게 마음 편히 원장님을 받아들인 건, 아마도 내가 편안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때쯤 나는 내가 조금은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다. 더 이상 초조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굳건해졌고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을 만큼은 성장해 있었다.
적어도 나를 흔들 수 있는 게 원장님은 아닐 만큼 정도.
첫 샵에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단단해졌다 생각했지만 이 넓은 세상에 비하면 나는
어린아이 일 뿐이었고 열심히 지내는 모습을 예뻐해 주는 분들도 많았다.
오픈 매장이었던 샵들은 서로서로 인사도 하고 친밀하게 지냈다.
그중 유독 손님들이 와글와글 하던 옷가게가 있었는데
보통 파는 물건이 전부 명품이었다. 그 옛날부터 이태리 물건을 직접 떼와 장사를 하셨고
오랜 시간 믿음과 신뢰로 몇백만 원짜리 가방을 먼지 쌓인 채 놓아도 물건이 팔리는 희한한 곳이었다.
사장님은 건너로 이사 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고 종종 오셔서 시술도 받으셨다.
그저 어리고 여린 나를 예쁘다 해주시고는 손님 소개 많이 해줄게~~라는 말을 하시며
손님을 비처럼 내려주셨다.
돈 많고 인품 좋아 보이는 손님들이 먼지 쌓인 명품가방을 백화점이 아닌 작은 가게에서 사들이고
좁아터진 나의 샵에 와서 굳이 차례를 기다리며 시술을 받고 가셨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됐다.
처음 오픈한 샵에서 귀인을 만났고, 내 시작은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터져나가게 들어오는 손님으로 인해 가게를 옮겨야만 했다. 손님이 넘쳐나 직원을 구해야 했는데
4평 남짓 작았던 샵은 직원이 앉을 곳조차 없었다. 샵을 넓혀야 했다.
그즈음 나의 귀인이셨던 옷가게 사장님은 모든 걸 접고 미국으로 향했다.
본인이 살던 곳으로, 딸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나의 작은 원장님도 변화를 맞이했다. 다단계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약도 팔고. 화장품도 팔고. 시술로 돈 버는 건 자잘 구리 해서 못해먹겠다며 때려치우셨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잠시 기대했었다.
진득이 앉아 노동의 대가를 얻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웬일로 기특한 길을 택했나 했다.
본성을 찾아 다단계의 길로 접어든 원장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우리 둘의 공생도 끝이 났다.
우악스럽게 덤비지 않아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끝날일은 끝이 난다.
내 인생 최대의 난제 일 것 같던 인연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