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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미상 Sep 22. 2024

네일샵에서 인생을 들었다#15

애증의 에어컨

잘 돌아가는 건조기는 볼 때마다 뿌듯했다.

엄마 집에도 언니 집에도 뽀송뽀송한 수건들이 나와있었다.


나는 그 사이 결혼을 했고 아이를 출산했다.  

큰 집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었고, 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건조기를 너무나 싸게 사 개이득을 얻었지만 남들에게 권하지 않았다.

오지랖은 가족에게만 부리는 스타일이다.

기다리네 마네. 아우 그런 소리 못 듣고 있는 편이라

맘 편하게 아무한테도 권하지 않았는데

그 부분은 자다가도 일어나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만 당해 얼마나 다행인가 ㅠ


이사 전 사실 연락을 해볼까도 망설였다.

한번 저렴하게 사보니 왠지 제 가격을 내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괜히 전화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진짜 내 스타일이 아니라 연락하지 않았건만

당하려면 이렇게도 당하고 저렇게도 당한다.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그곳으로 몰고 갔는지 희한하게 바로 그날 그 고객이 방문했다.


그날은 일을 마치고 가전제품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배는 불렀고 손님은 여전히 많았다. 시간이 없었고 늘 바빴기 때문에 만약 보고 왔다면 이미 계약을 해둔 상태였을텐데 신기하게도 진짜 그날 딱 그분이 왔다.


 가전제품 사려고?


먼저 말을 걸어주니 안 살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엄청 쌀테고,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

뭘 생각해도 엄청난 이득이다.

말도 안 되는 이득이기 때문에 애초에 말이 안 됐던 일인 것을 지나고 깨달았다.


언니는 나에게 필요한 가전제품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했고

의문의 A 씨에게 보냈다. 바로 답장이 왔고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했다. 읭??? 스러운 가격이었다.

다 반값이었다. 이 정도면 하자 제품인가??

아니란다. 다 새 제품인데 어떤 사정에 의해 싸게 나온 물건들이 있는데 그걸 보내준다는 거였다.

그럴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럴싸하지 않다 ㅋㅋ)


하지만 선뜻 오케이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두 달을 내리 기다려본 경험이 있는바. 나에겐 이사 날짜가 정해져 있었다.

이번엔 기다릴 수 없다. 일주일 안에 모두 보내주셔야 한다고 나름 강력히 말했고

의외로 쉽사리 대답을 받아냈다.


하긴, 기존에 나와있던 모델이니 당연히 설치 가능 하겠지.

지난번은 출시전이였으니까 기다린 거고.


맞네~~~~

 가벼운 기분으로 이사 날짜를 기다렸고,

계속 확인 전화도 했다.

(나름 철저했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물건은 예정대로 도착할 거란 대답을 거듭 받았으나


 이사 당일 가전제품은 하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개뼉다구 ㅠ


전화를 걸었다. 그럼 고객이 A에게 다시 전해준다.

그 고객이 A의 말을 다시 나에게 전한다.

이사철이라 너무 바빠 배달이 밀렸다고 말했다.

기사님 탓을 했다.

다른 건 괜찮으니 에어컨 만이라도 보내 달라고 말했다.

신생아가 있다고.

사정사정 끝에 며칠 후 에어컨이 배달됐다.


박스가 벗겨지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주문한 모델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좋은 모델이었다.

핑크골드빛 유려한 곡선을 뽐내는 최신제품으로 겁나 비싼 모델이었다.

예~~~ 전에 가격을 보고 그냥 지나친 기억이 있었다.

 무슨 에어컨이 거기서 거기지 저렇게 오백만 원짜리를 사는 사람이 있구나~~ 했던

오백만 원짜리가 배달되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늦게 배달해 줘서 미안한 마음에 좋은 걸로 가져다줬단다.

내 남편의 직업은 경찰이다.

남편은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고 했다.

이거 사기 같은데??


그럼 진즉 말해주지. 왜 말 안 하고 조용히 있었냐....


내가 너무 완강 불고집 스타일이라 내버려 두었나 보다. 당해야 끝나지 당해야..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음 제품을 기다렸고 역시 오지 않았다.  음식이 상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급한 건 냉장고였다.


나는 반드시 꼭. 얼음 정수기가 달린 냉장고를 원했다.

얼음 정수기가 달리지 않았다면 냉장고가 도착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얼음정수기 냉장고에 집착했다.


이젠 나도 나서야만 했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사기꾼 전화번호를 따냈다. 직접 통화를 했고

어디서 배달이 오고 있는지 이름은 뭘로 배달했는지 물었다.

근처 매장을 전화로 싹 다 뒤졌다.

알아낸 정보는 전부 거짓이었고,  오늘 오는 택배 차엔 얼음 정수기가 달린 냉장고 자체가 오고 있질 않다고 말했다.

 냉장고가 오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얼음정수기가 달리지 않은 다른 냉장고가 올까 봐 불안했다......  


지금부턴 뭐가 와도 이상할 게 없다.


나는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윽박대신에 애걸을 선택했다.  며칠뒤 얼음 정수기가 달린 실버색 냉장고를 받았다. 할렐루야.


잉.. 근데 냉수하고 온수는 어디 갔지????

 이거 정수만 되네....

얼음과 정수만이 작동되는 얼음정수기가 왔다. 물론 내가 시킨 모델이 전혀~~ 아니었다.


괜찮다.... 얼음이 나온다.


심지어 최신제품이다. 똑똑 노크만 해도 안이 훤히 보이는 그 광고 속의 제품. 또 제품이 업그레이드돼서 왔다.


세탁기. 세탁기도 왔다. 다만 한 짝만 왔다.


듀얼 세탁기를 시켰는데 위만 오고 아래는 안 왔다.


개판이었다. 


가만 보자... 내가 뭘 시켰었지?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TV, 청소기, 공기청정기, 김치냉장고, 로봇청소기

안온 게 뭐더라...... 아니 온 게 뭐더라....


상대적으로 급하지 않은 것들은 뒤로 미뤘다. 아마 받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급한 거부터 급한 것부터. 


그런대로 살려면 꼭 필요한 것들은 도착했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끝내 도착하지 않은 채

연락이 끊겼다.


그땐 거의

나도.. 사기인 거 알겠으니까. 거 양심적으로 세탁기까지는 줍시다.  아 줘요~~ 제발~~ 이런 식이 었다.


한 달 후 예견된 연락을 받았고, 경찰서로 출두됐다.


사기꾼과의 이력을 써줘야 했고, 피해 금액도 디테일하게 써내야 했다.

하.. 내 돈 떼인 것도 열받는데 이 바쁜 와중에 경찰서까지 가서 기억을 더듬으며 내용까지 줄줄 써야 하다니...


이런 게 의미가 있나요?라는 질문에.. 경찰은 대답했다.


피해금액을 돌려받지 못하실 순 있지만, 작성하신 내용에 따라 형이 달라질 순 있습니다.


나는 아주 아주 열심히 썼다.

피해 금액을 좀 부풀릴까 고민도 했다.

(약간 부풀렸다)


다녀와서 남편에게 들으니 어차피 초범이고 범위기 크지 않으면 좀 살다 쉽게 나올 것이라 말했다.

우리나라 사기죄는 경범죄다.


나중에 밝혀진 총피해액은 억 단위를 넘었으나 형량은 모르겠다.  


흔해 빠진 사기였지만 많은 사람이 당했다.

지역적 특색을 겨냥한,

비교적 기다림에 느긋한 충청도에서만 사기를 쳤단다.

실제 사기꾼이 잡혀 들어간 것도 모른 채 가전제품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피해자도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의 독촉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 집에 돌아와 남편의 말을 듣고

심란해졌다.  

근데 소개해준 고객은 관련 없어?

대부분 다 연결된 사람들끼리 공범이던데..


아빠는 말했다.


사기란 건.. 사기꾼이 표적을 정하고 다가오면 그냥 앉아서 당하게 되는 거라고


아직 사기를 당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기꾼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은 것뿐이니

상심 말라고.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신생아를 안고, 실소뿐이던 이사를 마치면서

나를 위안해 주던 건 에어컨뿐이었다.

예쁘네.... 예쁘긴... 예뻐


사기가 아니었으면 저렇게 비싼 에어컨은 아마 안 샀을 거야..

럭키...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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