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일상

시작은 매번 어설퍼

by 데이지

무언가를 시작해서 몰두하다 보면 다른 일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요즈음 아크릴 그림을 시작하고 어디 한 곳 나사 빠진 모양 영 어설프다.

한창 아크릴을 배운다고 화실을 나가면서부터 스케치하던 일, 책 읽는 일, 글을 쓰거나 블로그를 하는 일, 하다못해 좋아하는 드라마 보는 일까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크릴이 맘대로 잘되는 것도 아니다. 주변에서 짜증을 내며 왜 배우려고 하냐는 말까지 들었다. 아직은 재미보다 생각처럼 되질 않아서 화도 나고 온 신경이 쓰인다.


밤잠을 설치다 눈을 떠보니 새벽 4시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다시 잠은 오지 않는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화실에 그리다 만 노란 단풍나무까지 이어졌다.

어떻게 그리면 잘 그려질까로 시작해 어느 곳부터 그려 나가야 될지, 어떤 색을 섞어야 할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끊이지 않는 생각으로 잠이 달아난 지 오래다. 더는 누워만 있을 수 없어 살며시 로션과 드라이기를 챙겨 방을 나왔다. 시계를 보니 6시다. 대충 씻고 화실에 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집에서 나왔다.


새벽 거리는 한산하다.

화실 건물에 도착하니 이른 시각이라 주차장엔 차들로 즐비해 한쪽에 경우 자리를 잡고 지하로 내려가 불을 켰다. 밤새 고요했던 화실이 환하게 밝아오며 덩그러니 놓여있는 캠퍼스들이 보였다. 갑자기 밝아진 빛 때문에 저마다 뭘 하다 멈춰버린 것 같은 표정이다.

창을 열고 그리다 만 내 캠퍼스 앞에 앉았다.

아크릴은 물감을 바르고 계속 그 위에 물감을 덧입히는 작업이다. 그리다가 실수라도 하면 다시 덧입히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덧입힐 수 있다. 잠시 캠퍼스를 내려보다가 그리다 만 캠퍼스를 치우고 새 캠퍼스를 이젤 위에 올려놓고 뒤로 물러나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선 스케치부터 시작했다. 위치를 잡아가며 천천히 스케치를 하고 색을 조합해 어두운 곳부터 붓질을 했다. 이번엔 무작정 그리기보다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쳐다보며 조급함을 내려놓고 순차적으로 색을 입히며 넓혀갔다. 그랬더니 짜증을 내던 때와는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속도는 느려도 캠퍼스가 조금씩 채워져 나갔다.

화실에 왔을 때의 막막함이 사그라들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 같아 훨씬 편해졌다.


이제는 작업 전에 나만의 원칙을 만들었다.

그려야 할 대상을 보고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지 시간을 가지고 생각한 뒤 순서를 정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순서에 맞춰 배경을 입히든지 스케치를 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때때로 멈춰서 뒤로 물러나 그림을 바라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수를 하고 나야 비로소 낳아지는 것이 나인가 보다. 누군가는 어설프다고도 하겠지만 나름 흡족한 마음으로 화실을 나왔다. 너무 오래 그려도 짜증이 날 것 같고, 오래 앉아 작업하다 보면 여기저기 몸도 쑤시기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봤다.

까짓것 그리면 되지, 무작정 덤벼들 듯 그렸다가 수없이 많은 수정을 해야 했고 종래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 천천히 조급함을 버리고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얻었다.

무엇이든 한 번에 되는 것은 없다. 처음은 어설프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앞으로 나갈 수가 있다. 모든 일이 다 그런 이치인데 매번 잊어버리고 후회한 뒤 깨닫게 되다니, 그래도 나름의 방안을 찾아가는 나를 만나서 기쁘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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