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일상

여름날의 어떤 하루

by 데이지

한여름 무더위가 끝도 없을 것 같더니 연일 비가 내리며 주춤한다. 하지만 높아진 습도와 바람에 비가 흩뿌려 창문을 닫고 지낼 수밖에 없어 체감온도는 조금도 내려가지 않고 불쾌지수만 더 높아졌다.

밤새 비가 오다 말다 하더니 주말 아침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된장찌개와 달걀프라이로 아침을 먹고, 선풍기를 틀어 놓으니 살만하다.


날은 흐리고 비는 오락가락 딱히 할 것이 없던 차에 남편이 창문 앞을 서성이다 동네산책을 가자고 한다. 다른 날 같았으면 대꾸조차 안 했을 테지만, 오늘은 습도가 높기는 해도 바람이 불어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위가 시작되면서 올레길을 걷기도 동네산책도 못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올레길이야 더위가 지나갈 때까지 쉬기로 했지만, 동네산책은 너무 오랜만이다. 산딸기와 오디가 한창일 때는 자주 걸었고 무화과가 호두알만 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사이 얼마나 컸는지 궁금하다.

모자와 팔토시, 얼굴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동네를 돌아 제주대학교까지가 왕복 6km 정도 거리다. 학교 근처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 한잔 마시기로 하고 출발했다.


집을 나서 동네 골목길로 접어들자마자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은 무화과가 보였다. 그 사이 아기 주먹만큼 자라서 더러는 익은 것도 있다. 담장 위로 올라가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단내를 풍기며 벌어진 무화가가 보였다.

"저거는 따 먹어야 걸을 수 있겠다. 그냥은 못 가. 가는 내내 아쉬울 거야!"

"그럼 그렇지! 순순히 따라나설 때 알아봤다."

남편이 한 마디 뱉고는 담장 위로 올라가 내가 가리킨 무화과를 따서 내려왔다. 단내가 코를 찔렀다.

"이제 됐어! 좋아!"

"응 좋아!"

무화과를 받아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큼한 맛과 톡톡 터지는 씨가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어?"

"응. 달아 너무 맛있어!"

우물우물 씹으며 웃었다.

"저기 저것도 따주면 안 될까? 송이도 무화과 좋아하는데."

"지금은 안돼! 돌아오는 길에 따다 주자."

"그래, 그럼."


이곳 무화과는 주인이 있다.

몇 해전 지나가는 사람마다 무화과를 따먹느라 담장에 올라가서 담장이 무너진다는 표지판과 함께 담장을 넘는 가지를 모두 잘라 버렸었다. 그래서 한동안 무화과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무화과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한 해 두 해 크더니 무화과는 예전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유난히 알이 굵어서 새들도 무화과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산책길 초입에 있는 이 무화과는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와보면 익은 것은 벌써 누군가가 따먹고 없다. 눈으로 찜만 해 놓으면 소용없다는 말이다.


무화과 한 알이 준 행복감을 품고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복숭아나무에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한쪽 볼을 발그레하게 붉힌 복숭아는 나를 또 유혹했다.

"복숭아다! 저 복숭아도 하나만 따주면 안 될까?"

"오늘은 무화과 하나로 만족해. 욕심부리지 말고."

단호한 남편의 말에 발을 동동 굴러도 봤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질러 걷는다. 이럴 때는 아무 방법도 소용없다. 뒷따라 걸으며 그 사이 알이 굵어진 감도 귤도 보았다. 돌담 위로 영글어 가는 참깨도 보이고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고도가 높아져서인지 콩밭에서 놀고 있는 노루도 보았다. 제주에서 30분 정도 걷다 보면 노루나 꿩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다.

흐린 날씨지만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따가운 햇볕이 없어서 걷기에 좋았다. 나무도, 들판도, 내가 탐내는 복숭아도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이것저것 오감을 열고 보고, 듣고, 만져보고 느끼며 걷다 보면 목적지는 지척이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에어컨바람에 잠시 땀을 식히고 집으로 향했다.

한 달 남짓 지나면 노랗게 익어가는 귤밭이 산책길 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책하면서 귤은 한 번도 따먹지 않았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렁주렁 열린 귤은 예쁘다고 하면서 눈으로만 즐겼던 것 같다.


무화과나무에 다시 가보니 찜해 놓았던 무화과가 그대로 있었다. 비가 내려 산책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들고 있던 장우산을 펼쳐 무화과를 따서 딸에게 가져다주었다. 얼마 후 식탁에 무화과 꼭지만 달랑 남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오늘 남편과 나 그리고 딸은 공범이 되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