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밖에도 청소년은 존재한다 : 영화『거인』

by 공익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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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청소년이 학생이 아닌 것처럼, 모든 청소년들이 가정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가출 청소년’


예전에는 그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가출 청소년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긍정적이진 않을 것이다. 무리 지어 골목길에서 학생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모습, 술과 담배를 일삼으며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들이 블러 처리되어 뉴스의 자료화면으로 쓰이는 장면들이 자연스레 떠올라 버린다.


가출 청소년이란 단어는 그들의 ‘왜’ 가출을 결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에는 가출 청소년이란 단어 대신에 ‘가정 밖 청소년’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청소년 쉼터협의회에서 가출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를 보면 그들이 가출을 결심한 이유는 단지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정폭력과 같은 이유로 집을 나온 생존형 원인이 40.1%로 1위에 달하기 때문이다.


영화 ‘거인’의 주인공 영재도 스스로 집을 나와 시설로 들어간 가정 밖 청소년이다. 폭력적이고 일할 의지가 없는 아빠, 몸이 아픈 엄마, 자신보다 어린 남동생까지. 자신이 집에서 나오는 것이 더 생존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화 내내 영재는 간절하다. 간절하다 못해 비굴하고 악하다.

면전에서 악담을 퍼붓는 쉼터 관리자에게 ‘아빠’라고 부르며 웃어 보이고, 돈 때문에 몰래 기부받은 운동화를 팔아 치우기도 하며, 룸메이트인 친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며 어떻게든 쉼터에 남아 있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영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살고 싶다는 것.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착하게 살고 싶다는 것 단 한 가지뿐이다.

가정 안 청소년에게 당연한 선택지를 쟁취해내기 위해 영재는 신부님, 선생님, 수녀님의 손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빈다. 구박받고 눈치만 보게 만드는 쉼터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그 옆은 절벽이란 것을 영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해 집을 나오는 청소년의 숫자는 2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가정 밖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는 전국에 140곳뿐이며, 이곳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1,3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쉼터의 70%는 일시/단기용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정에서 탈출한 청소년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너무나도 미비한 것이다.


한국에서 가정 밖 청소년을 위한 보호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정으로의 복귀를 돕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설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가정이 위협적으로 느껴져 도망친 아이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마찬가지다. 많은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시설을 택하게 되는데, 단체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설생활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된다.


그 외의 가정 밖 청소년을 보호하는 방법으로는 가정에 양육을 위탁하는 ‘가정위탁’ 제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을뿐더러 지원해주는 지원금 또한 한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다.


미국과 스웨덴에서는 이 아동 위탁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두 국가는 모두 보육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이 시설 보호를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한다면, 그들은 시설보호를 최후의 선택이라 생각한다. 시설에서 보호받게 되더라도 그 기간은 대부분 단기에서 끝난다.


스웨덴은 아이가 가정이 아닌 다른 시설에서 집단으로 자랄 때,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아야 하는 사랑과 애정을 경험할 수 없어 차별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스웨덴은 전 세계적으로 입양 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다. 해외입양도 활발하여 전체 아동 중 1%가 해외 입양아라고 한다. 모든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서 자라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스웨덴은 생각한다. 그렇기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스웨덴 사회 내에서 어떠한 도덕적 낙인이나 정치적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스웨덴과 달리 안타깝게도 한국의 가정 밖 청소년들은 수많은 차별과 편견, 생존적 선택의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그 아이들 모두가 어긋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인』 속 영재도 마찬가지다. 영재는 끝까지 자신의 동생에게 책임감 있고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여 준다. 동생은 자신과 다른 환경에서 크길 바라서다.


그러나 나는 영재가 동생에게 자신이 원했던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을 ‘흉내’ 냈다고 생각한다. 책임감 있고, 아이를 먼저 보호하려는 어른들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다고 느꼈기에.

그래서 동생에게만은 자신이 그런 기댈 수 있는, 거인 같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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