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은 영원하다고 했던가.
드라마 <사내 맞선>은 클래식을 넘어 클리셰로 시작해서 클리셰로 끝나는 작품이다.
<사내 맞선>의 원작은 동명의 웹소설이다. 드라마 <사내 맞선>의 장점이자 특징으로 꼽히는 한 회차 만에 마무리되는 사건 사고, 사이다식 결말, 궁금증을 유발하는 회차의 마무리는 웹소설 장르가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지금껏 다양한 웹소설들이 드라마화됐지만, <사내 맞선>은 가장 웹소설 장르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도 <사내 맞선>과 비슷한 포맷을 가진 로맨스 드라마가 공개됐다. 이미 시즌 1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시즌 2로 돌아온 <브리저튼>이다.
<사내 맞선>과 <브리저튼>은 굵은 줄기로 봤을 때, 둘 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 신데렐라 스토리를 어떻게 전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연히 다른 시각의 차이를 보인다.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상류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대상으로 보자면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만연하고, 계급 사회 안에서 평민과 귀족이 생활하는 공간까지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상류 사회 안에 약간의 픽션을 가미한다. 상당히 다양한 인종들이 작품에 출연 중이기 때문이다. 왕비를 비롯하여 주인공 상대역들은 모두 짙은 피부색을 갖고 있다. 시즌1과 시즌2의 주인공인 브리저튼 가의 남매들은 모두 자신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
주인공들의 감정선과 충돌을 보고 있자면 소설 <오만과 편견>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먼저 오해가 생기고, 오해 때문에 서로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기다가, 그 오해가 풀리면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며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이어진다.
행복의 끝이 결혼이라는 결말은 구시대적이지만, 애초에 <브리저튼>은 브리저튼 가 남매의 결혼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철 지난 유행가 같은 스토리를 비틀어보고자 하는 연출진의 노력은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브리저튼>의 등장하는 여성들은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평생 동안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인문학을 익히고, 예술적 소양을 기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시청자에게 현시대와의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브리저튼>의 여성들이 결혼만을 목적으로 교육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승마, 펠멜 게임 등 여러 방면에서 누구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기회가 없었던 거다.”라는 대사와 함께 말이다.
<사내 맞선>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브리저튼>보다 게으르다.
여자 주인공이 분명 능력 있는 캐릭터로 설정된 건 맞는데, 좀처럼 노력과 성과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 주인공의 갑질에 가까운 횡포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장면을 귀엽다는 듯이 길게도 보여준다.
몰카 범죄의 타깃이 되어 신상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여성 캐릭터들은 서로를 위로하는 것 외에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상황을 해결하고 그녀들을 구해주는 것은 남성 캐릭터들이다. 분명 여성 조연 캐릭터가 작품 내에서 영향력 있는 재벌가의 딸임에도 말이다.
물론 ‘요즘’ 드라마이기 때문에 성역할이나 일상 속 차별적인 상황에 대해 약간의 언질은 한다. 그러나 정말 ‘말’만 한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식이다.
<브리저튼>에서 성역할의 부당함과 차별에 대해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엘로이즈’를 비난하는 장면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국은 남녀 임금 격차와 임원 비율 등을 평가하는 <이코노미스트> ‘유리천장지수’ 조사에서 9년째 꼴찌를 기록 중이다. 국내 상장법인의 여성 임원 비율은 5.2%로 OECD 평균인 25.6%의 1/5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OECD 국가를 대상으로 남녀 임금격차를 조사한 데이터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꼴찌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35.9% 적은 평균임금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OECD의 평균 남녀 임금 격차는 12.8%이니, 한국 여성 노동자들은 OECD 평균보다 2.5배나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데이터들이 한국의 구조적인 성차별을 드러냈기에 사회 곳곳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미디어 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간 영상업계에서는 남성은 적극적인 지배자, 여성은 수동적인 피지배자의 포지션에서 벗어난 작품을 만드는 시도를 반복적으로 해왔다.
기대작이었던 드라마 <더 킹>은 작품 안에 내재되어 있던 성별의 구시대적 요소들에 관한 아쉬운 코멘트들을 남기며 막을 내리기도 했다.
사실 현재 <사내 맞선>의 흥행은 시대를 역행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결국 고착화된 성역할의 탈피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답답하지 않은 드라마 전개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클리셰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많은 창작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한다.
“대중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은 낯설어한다. 오히려 클리셰 안에서 약간의 차별점을 주었을 때 더 열광한다.”
클래식이 영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리셰는 포맷에 한해서야 한다. 사건을 진행하는 방식에 대해서야 한다. 변화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을 작품 안에서 ‘클리셰’라는 편한 이름을 붙여 이용해버린다면, 결국 그 여파와 힘듦은 현실에서 감당해야 될 것이다.